[영화읽기]
네 이웃의 환상을 침해하지 말라, <어린 신부>
2004-05-12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어린 소녀들의 행복한 백일몽 <어린 신부>

<고만고만한 로맨틱코미디 중에 <어린 신부>가 단연 흥행 톱이다. 이유가 뭘까? 문근영과 김래원이 워낙 매력적이라서? 물론이다. 그러나 <첫사랑 궐기 사수대회> 등 빈약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배우의 매력만으로 땜빵하려 한 영화들의 운명을 잊었는가? ‘문근영 쇼!’라는 한마디로 흥행을 일갈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롤리타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불순한(!) 영화’라고 몰아붙여볼까나? 말은 된다. 듀나의 지적처럼 문근영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고, 그녀의 ‘귀여움’은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귀여움’이 누구를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장치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롤리타 콤플렉스에 찌들어 있는 아저씨들에게 서비스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녀의 귀여움은 듀나가 말하듯 성적 매력과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다기보다는 훨씬 탈성적(脫性的)이며, 영화는 ‘하나도 안 야하기 때문에’ 아저씨들은 욕구불만에 빠지고 만다. 오히려 이 영화는 왕스트레스에 찌들어 있는 소녀들에게 ‘대신 꿈꾸어줌으로써’ 확실하게 봉사하는 영화이다. 꽤나 현실적이었던 영화 <싱글즈>에는 “20살 땐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지… 19살 때는 대학에 붙기만 해도 소원이 없었지… 아니 그땐 우리 셋 다 얼른 집 떠나는 게 소원이었지”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녀들은 ‘일과 결혼’이라는 과제에 골머리를 썩이며, 당장의 카드비가 걱정이다. 현실이 이와 같다. 우리의 소녀들도 그쯤은 안다. 대학에 가야 하고, 커리어우먼이 돼야 한다. 엄청난 성적 매력과 교활함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연애나 결혼도 순탄치 않다.

그만∼ 그만! 누가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랬나? 그렇게 일깨워주지 않아도 좋은 대학, 전문직, 멋진 남자, 아무한테나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벌써 또래에서도 길이 갈린다. 소녀들은 불안하다. ‘당당한 성인여자 되기’에 한참이나 못 미친 그녀들의 불안한 무의식과 은밀한 성적 욕망이 <여고괴담> 시리즈, <고양이를 부탁해> <장화, 홍련>, 단편 <물안경> 등의 ‘소녀-영화’ 속에 언뜻언뜻 출몰하여왔다. 악몽의 형태로 지표면 아래를 축축이 적시던 그녀들의 꿈이 이제 백일몽의 형태로 지표면 위로 환하게 나온 것이다. 이 영화는 가히 ‘꿈을 찍는 사진관’이다. CF 카피 “엄만 내 맘이 보여요?”가 떠오를 지경이다. 집을 떠나고 싶은 소녀들, 그러나 가출하면 곤궁해진다는 것 잘 안다. 싫은 아저씨들과 “원조”나 해야겠지. 그런데 잘생긴 대학생 오빠(음… 교생선생님 같은? 응!)랑 합법적인 결혼이라니! 그리고 그 오빤 나를 잘 알고, 날 다 이해해 줘야 돼(친척 오빠처럼? 응!). 근데 세대차이 쫌 나지 않을까? 고삐리가 더 좋기도 하거든?(그럼 고삐리랑은 연애해! 그래도 돼?) 근데 대딩이랑, 고딩이랑 살면 뭐 먹구 살아? 그런 건∼ 어른들이 다 주든가 해야지. 그러니까 둘이 막 좋아서 하는 게 아니고, 난 싫은데, 어른들이 시켜서 하는 거니까 집이랑 그런 거는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해야지 뭐. 학교는 어떡하구? 그냥 다니지 뭐. 친구랑 떨어지는 거 싫잖아. “결혼해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너∼ 근데∼ 결혼하면 섹스하는 거야. 그거 하구 싶어서 그러는 거지? 아-니-! 말도 안 돼∼! 그건 쫌 나중에 하구우∼!

양손에 떡인 우리의 근영이는 ‘근영 친구’가 꾸는 꿈이다. 흠모하는 야구부 주장이 사귀자 하고, 교생과 신접살림을 차리고, 술집에 교복 입고 가서 언니, 오빠들과 대등하게 논다. 그리고 친구와의 우정도 변함없다!

치∼ 그런 게 어딨어. 남편에 애인에, 네가 그렇게 섹시해? 여기서 문근영이 섹시하면 큰일난다. 소녀들 가슴에 대못 박을 일 있나?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에서처럼 잘난 그녀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녀는 응당 또래 소녀들보다 미성숙하고, 잘난 게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소녀들은 경계를 늦추고, 꾸던 꿈을 마저 꿀 수 있다. 이런 그녀들의 꿈꾸기가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불순하지 않냐고? 걱정도 팔자다. 사족처럼 달린 에필로그는 소녀들의 자기검열이자 꿈 깨는 장면이다. ‘음… 내가 이런 꿈이나 꾸고 있으면 몇년 뒤 폭삭 늙고 무식한 아줌마가 되고 말걸! 에잇 공부나 해야지.’ 참고로 이 영화를 보고 ‘강제결혼이 허용된 법’과 ‘인권침해’를 우려하시는 분들께 두 가지 사항을 전하고 싶다. 첫째, 현행 민법상 남자 18살, 여자 16살 이상일 때 당사자간 합의를 전제로 혼인이 성립되며, 20살 미만인 경우는 부모의 동의를 요한다는 것이지, 부모들끼리 동의하면 당사자간 합의 없이도 강제로 결혼시킬 수 있다는 조항은 없다. 둘째, 지젝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네 이웃의 환상을 침해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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