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연안의 최고의 휴양지답게 눈부신 태양으로 손님맞이를 하던 프랑스 남부 도시 깐느의 날씨도 올해는 눈치를 보는지 잔뜩 구름 낀 하늘에 비까지 추적추적 흩뿌렸다. 예술분야 비정규직 노조의 깐느국제영화제 개막저지 선포로 1968년 이래 두번째로 개최가 무산될 위기를 겪으며 한바탕 전운이 감돌던 깐느는 영화제 쪽과 노조의 극적인 타협으로 외견상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턱시도와 드레스 차림의 게스트들 뒤로 협상(negotiation)이라는 단어의 철자를 하나씩 등에 붙인 노조원들이 레드카펫을 한 바퀴씩 돌았다. 여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예민하고 어수선한 가운데 제57회 깐느국제영화제가 12일 저녁(현지시각) 팔레 드 페스티발에서 12일간의 영화 축제를 시작했다.
노조와 실랑이‥비까지 추적, 거장영화 줄고 신인감독 약진
한국작 <올드보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경쟁부문에올해 깐느 개막풍경은 가라앉은 날씨만큼이나 차분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수백명의 인파를 들썩이게 했던 할리우드 스타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게 그 단적인 예다. 노배우 막스 폰 시도와 이번 영화제 심사위원인 에마뉘엘 베아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와 〈나쁜 교육〉에 출연한 레오노르 발팅 등이 개막식에 참석한 배우로 눈길을 끌었을 뿐이었다. 개막작인 〈나쁜 교육〉도 최근 몇년 간의 ‘축제 분위기’용 영화와 180도 달랐다. 이전의 어느 개막작보다도, 그리고 근래에 발표한 알모도바르의 어떤 영화보다도 무겁고 어두웠다.
누아르와 멜로 드라마를 진하게 칵테일한 〈나쁜 교육〉은 어린 시절 엄격한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만났던 두 소년을 통해 금지된 욕망과 좌절, 복수와 죽음을 이야기한다. 십대 시절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사랑에 빠진 두 소년은 그중 한 소년을 사랑하는 사제 교사에 의해 강제적으로 결별당한다. 성적 착취, 불운한 성장, 복수로 이어지는 이 영화엔, 종교를 비판하고 인간사의 진실을 캐는 매체로서의 영화에 대한 자기 성찰이 담겨 있다. 축제용 영화로는 적절치 않을지 몰라도 근래 깐느 개막작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경쟁 18편, 비경쟁 포함 56편의 영화가 초청된 이번 영화제의 특징은 이미 알려진 거장의 영화가 줄고, 신인 감독들이 약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쟁작 가운데 과반수인 12편이 경쟁부문에 처음 오른 감독의 작품들이고, 9명은 아예 깐느에 처음 온 얼굴들이다. 또 형식적 실험 못지않게 대중적 교감을 중시하는 점도 눈에 띈다. 이를 두고 3년 전에 취임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가 올해부터 작품 선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티에리 프레모는 “올해의 흐름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며 “영화는 관객과 교감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로 경쟁부문에 오른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가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영화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마침내 경쟁부문에 진출한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도 수상 여부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밖에 반미·반부시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에 이은 마이클 무어의 신작 〈화씨 9/11〉, 타이 영화사상 최초로 칸 경쟁부문에 진출한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의 〈트로피칼 말라디〉, 영화제 개막 직전까지도 촬영이 끝나지 않았다는 소문으로 영화제 쪽을 애타게 만든 왕자웨이 감독의 〈2046〉 등이 전세계 영화인들의 관심 속에 상영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