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신작 <스파이> 제작 준비 중인 이경규
2004-05-20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기타노 다케시도 처음엔 힘들었다잖나"

이경규(44)에게 <복수혈전>은 트라우마다. 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김용만은 이경규에게 짓눌릴 때마다 품속에 숨겨놓은 비수처럼 ‘복수혈전’을 꺼내든다. 으르렁거리던 이경규는 이내 잠잠해진다. 웃음을 주려는 의도지만, 정작 당하는 이경규 입장에서 맘이 편하지만은 않다. 두 번째 영화 <스파이>(가제)를 제작하기 위해 나선 지금, 12년 전 그가 직접 감독하고 출연했던 <복수혈전>은 넘기 쉽지 않은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1998년 일본에 머물 당시 만났던 오덕재 감독과 의기투합, 영화사 이오필름을 차린 다음 은밀하게 영화제작 준비를 해온 이경규를 만나 이것저것 물었다. “한국영화 개봉작은 모두 극장에서 챙겨보고, 화장실에 가서 얼굴 가리고 관객 반응을 꼭 염탐한다”는 그는 “코미디언에 대한 편견을 접어달라”며 거듭 주문했고, “결과물로 인정받고 싶다는 소망”을 여러 번 피력했다.

제작사를 차린 지는 꽤 됐다.

조폭영화 붐이 일었을 때 영화를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도 있었는데 시류에 따라서 하는 건 싫더라. 그러다가 우연찮게 분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남북 대치라는 상황이 힘이 있잖나.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를 봐도 그렇고. 그래서 소재 개발하면서 전향하신 분이나 탈북한 분들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북한에 가면 지하 벙커에 남한의 거리를 재연해놓은 간첩훈련소가 있다는 걸 듣고 이거다 싶었다.

간첩 소재 영화인가.

가제로 <스파이>라고 붙여놨는데. 남한에 침투하기 위해 남한을 배워야 하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남한의 다방에 가면 커피를 어떻게 마시고, 남한의 여관에 가면 숙박계를 어떻게 써야 하고, 고스톱은 어떻게 치고, 욕은 또 어떻게 하고. 그런 걸 배워서 남으로 내려왔는데 교관이 옛날 사람이라 구닥다리만 가르쳐줘서 서울에 와서는 굉장한 혼란을 겪는다는 내용이다. 문화충돌인 거지. 일본에 있을 때 외국인으로서 문화적 이질감을 느꼈는데 그래서 이러한 소재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간첩 리철진>의 몇몇 설정과 유사하다.

나도 봤는데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사상과 이념은 없는 영화다. 간첩을 직업으로 갖게 된 사람들의 애환에 대한 묘사가 많다. 북한 분량도 25분이나 되고.

언제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가.

지난해 4월부터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시나리오만 한 15번 적으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내가 적었다가, 한번은 다른 작가 선생이 적었다가 그러기를 반복했다. 됐다 싶어서 내려놔도 1주일 지나서 보면 허점이 나오고 그러면서 1년이 갔다. 호텔에서 밤도 많이 샜다. 시나리오 쓰고 나서도 북에서 내려왔던 분들한테 자문을 많이 받았다. 캐릭터들을 지나치게 희화화하고 싶지 않아서다. 영화쪽에서 박중훈이 유일하게 친한 동료라 조언도 해주고 하는데. 소재는 독특한데 이야기를 푸는 방식이 좀 아쉽다고 하더라.

영화한다고 했을 때 아내와 딸 예림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다.

아내는 내가 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우리 와이프한테 몇 가지 소재를 이야기한 적은 있지. 이거 어떠니, 저거 어떠니 했는데 다 재미없다고 반대했는데 <스파이>는 요건 재밌네 그러더라. 그게 전부다. 그 다음에 내가 영화한다고 뭘 하고 다니는지는 잘 모르지. 예림이는 요즘 우리 집 컴퓨터에 영화대박을 기원하는 바탕화면을 깔아놨다. 시나리오를 보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대사 중에 욕설이 좀 있어서 일부러 안 보여준다.

캐스팅 중인 것으로 안다. 어려움은 없나.

내가 적은 시나리오라고 말 안 하고 주면 읽고 나서 재밌다고 한다. 근데 내가 썼다 하면 사람들이 갑자기 심각해진다. 잘 안 웃어. 심각하게 본다고. 배우들도 나랑 같이 영화해서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없진 않을 거다. <복수혈전>에 대한 이미지가 남아서 그런지 시나리오를 보는 사람들은 자꾸 문제점만 파헤치려고 한다. 박찬욱 감독 같은 분한테는 시나리오가 허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이야기 못하지. 연출력과 감각을 믿고 같이 갑시다,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어. 시나리오 주면 다들 물어뜯으려고 한다니까. 전에는 방송 섭외가 들어오면 거칠게 응했는데 이제 거절당한 쪽의 심리를 아니까 요즘은 잘 안 그런다. 거절해도 정중하게 한다. 영화하면서 정말 인간 됐다. 칼자루를 쥔 사람과 칼 끝을 쥔 사람의 차이를 알겠더라.

이번엔 연출만 하는데.

아직 공개적으로 말 안 한 건데 감독은 안 한다. 이번엔 기획제작만 할 거다. 감독한다고 하니까 팬들은 하라고 하고, 주위 동료들은 하지 말라고 하더라. 감독은 좀 무리가 아니겠느냐면서. 영화쪽 분들도 만류했었다. 나 또한 배우들이 따라줄까, 연출 잘 못하면 어떡하나, 투자·배급사에서 인정해줄 건가 그런 고민에 휩싸였다. 게다가 마케팅이나 다른 부분들도 신경쓸 게 많을 것 같고. 그래서 오덕재 감독이 맡기로 결정했다. 이번에 공부하는 셈치고 난 다음 작품 할 수 있는 거니까. 욕심 때문에 돈 들여서 실험을 할 순 없지 않나.

감독을 하지 않더라도 고민이 많을 것 같다.

<스파이>가 성공리에 안 끝나면 큰일난다. 개망신이지. 영화인이라면 실패해도 다음 작품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텐데. 나야 이번에 못 만들면 꿈을 접어야 하니까. 영화 준비하면서 술 무지하게 먹었다. 몸도 많이 버렸고. 주위에서는 얼굴이 맛이 갔다고들 한다.

충무로 안팎의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나.

책에서 읽은 건데 기타노 다케시도 지금이야 명성을 얻어서 그렇지만 초창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더라. 코미디언이 감독을 한다고? 내가 배우라고 해도 그런 반응이었을 거다.

언제 촬영에 들어가나.

조만간 주연배우가 결정될 것 같다. 그러면 바로 촬영에 들어갈 생각이다. <와일드카드>에서 안마시술소 사장으로 나오는 이도경씨는 교관에 적역이라 1년 전에 섭외해서 출연키로 했는데 다른 시나리오가 들어오는데도 내 영화 들어가기만 기다리고 계신다. 유혹도 많았을 텐데. 그러니까 빨리 들어가야 된다. 안 그러면 큰일난다. 나 믿고 돈을 대준 개인 투자자들이 영화 언제 들어가냐고 하면 <태극기 휘날리며>도 시나리오만 2년 했고, <살인의 추억>도 송강호라는 배우 스케줄 때문에 1년을 기다렸다면서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면목 세우려면 어서 해야지. 그런데 요즘은 통 전화도 안 하시네. (웃음)

<복수혈전>을 찍을 당시와는 현장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공부한다고 현장 많이 다녔는데 시스템이 많이 변했더라. 10년 전만 하더라도 카메라 감독 외에는 현장에서 그림이 제대로 찍혔는지, 못 찍혔는지 잘 모르잖나. 오케이해놓고서도 나중에 러시 보고서 이건 왜 이렇게 나왔을까 했는데 지금은 현장에서 컴퓨터로 편집하고 그러니까.

전유성, 박세민, 서세원, 심형래 등 영화쪽에 관심을 가진 코미디언이 많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찰리 채플린을 닮으려고 그러나. (웃음) 코미디언은 설정부터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다보니까 영화 창작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것 같다. 나도 내가 생각했던 아이템들이 과연 대중한테 먹힐까, 안 먹힐까를 눈으로 보고 싶다. 과연 내가 앞서갈 수 있는 사람인가 확인하고 싶은 거지. 코미디언으로서는 새로운 것 해서 성과를 봤는데. 영화 또한 그렇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유년 시절에 영화를 많이 봤다던데.

액션영화는 정말 좋아했다. 주로 부산역 근처에 대도극장, 중앙극장에 갔는데. 야한 장면 나오면 휘파람 불어대고 주인공한테 ‘좋겠다 이 새끼야’ 공공연히 소리지르고. 결투에서 주인공이 이기면 박수치고. 담배 피우다가 침 퉤 뱉기도 하고 뭐 그러던 시절이라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극장에 그냥 들여보내줬다. 집에 안 들어오면 부모님이 극장에 와선 잠든 나를 깨워서 데려간 적도 많다. 왕우의 외팔이 시리즈, <황야의 무법자> 같은 마카로니 웨스턴은 거의 다 챙겨봤다.

<복수혈전>은 개인 돈을 들여서 만든 건가.

개인 돈 4억원을 털었는데 부도 맞고 그래서 메우느라 힘들었다. 서울에서 2만명 들고 지방까지 하면 4만∼5만명은 됐으니까 관객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방학 때 걸었으면 더 잘됐을 텐데 외화에 밀려 10월에 개봉한 것도 흥행이 저조한 이유다. <미스터 맘마> <우리 사랑 이대로> 등이랑 함께 걸린 부산에서는 내 영화 보려고 줄도 섰고 상영 끝나고 박수도 나왔다. 대역없이 액션한 거 보고 너무 열심히 했다면서. 그래도 이경규가 지금 영화 만든다고 해도 <복수혈전>이 있으니까 느닷없다는 느낌은 안 주잖나.

후반부는 액션장면이 꽤 많더라.

마지막 20분은 쉬지 않는 논스톱 액션이다. 게다가 당시 영화진흥공사에서 녹음하는데 기술 스탭들이 뒷부분 액션이 약하다고 품평하기에 20분 분량을 3일 밤낮으로 재촬영했다. 너무 무리해서 그거 찍고 나니까 입이 돌아가더라.

<복수혈전2> 계획도 있나.

이번에 잘되면 다음에 내가 연출할 계획이다. 돌아온 이소룡이라는 컨셉으로 코믹하게 끌고 가려고 한다. 출연도 할 생각인데, 요즘 그래서 틈나는 대로 운동하고 있다.

영화면 영화, 방송이면 방송 어느 한쪽에 전념해야 한다는 조언도 많이 들을 텐데.

그런 말도 많이들 하신다. 실제로 두 가지 일을 다 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방송을 그만둬. 영화만 할까 싶기도 한데. 근데 방송 안 하고 영화 하면 방송이 안 되니까 영화하려 든다는 말이 돌 거다. (웃음) 결과적으로 영화공부하다 보면 코미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극 구성도 하고 캐릭터도 만들다보면 자연스럽게 웃기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니까. 사실 코미디 20년 이상 했지만 탁탁 막힐 때가 있다. 그런데 잠깐 외도하고 돌아오면 길이 보인다. ‘이경규가 간다’ 끝내고 나서 일본에 1년 갔다 왔더니 또 새로운 게 보이데. 유학갔다 온 지 4년 됐는데 지금 많이 막힌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전에 써먹었던 걸 또 써먹는구나 싶을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힘들더라도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게 나한테 도움이 될 것 같다.

코미디언과 감독. 두 일은 개인적으로 각각 어떤 의미인가.

웃기는 건 직업이고 영화는 꿈이지. 환갑이 넘어서도 사람들을 웃기고, 또 관심 끄는 코미디언으로 남고 싶다. 영화는 한편 만든 걸 추억으로 갖고 가면 되는데 그러기엔 뼈마디가 너무 쑤시니까 하는 거다.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운명 같은 거지. 누구는 돈 벌려고 하는 거 아니냐 할지 모르는데. 돈 벌려면 방송 프로그램 몇개 더 하면 된다. 좋은 영화 만들어서 관객한테 감동주겠다는 진정성을 이번 기회에 인정받았으면 싶다.

전에 50이 되면 골프 유학을 간다고 했는데.

사람 마음이 매번 바뀌니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코미디처럼 영화도 계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은 도저히 안 바뀔 것 같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