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스 앤 젠틀맨>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고급호텔과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북아프리카 사막을 배경으로, <프랑스 중위의 여자>(역시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처럼 프랑스인과 영국인의 사랑을 끌어들인 품격있는 로망스다. 국제적이고 유럽적이며 무엇보다 프랑스적인 화면은 중년 남녀의 내적 위기와 새로운 모험을 시종일관 섬세한 교차편집으로 엮어낸다. 그러나 기억상실과 시공간 혼합 등 매우 지적일 수 있는 모티브들은 를르슈에게 장식품일 뿐이다. 심지어 영화 전체가 그렇다. 요트와 보석, 고급 홀에 둘러싸인 주인공들은 도둑과 가수가 아니라, 모로코를 신비롭고도 위험한 이국으로 바라보며 그들만의 고급한 멜랑콜리를 나누는 서구 부르주아의 전형이다. 모로코를 배경으로 한 상투적인 오리엔탈리즘에서 <남과 여>의 두근거리는 파토스를 기대하긴 무리다. 대신 노감독은 고전 샹송들을 비롯해 <남과 여> 주제곡까지 부르는 파트리샤 카스의 MTV풍 화면에 심혈을 쏟는다. 프랑스 영화의 한 경향은 그렇게 자신의 신화를 스스로 향수하며 나른한 백일몽을 읊조린다. 아쉬운 건, 영화가 참조한 “삶은 잠이고 사랑은 그 꿈이다”라는 알프레드 뮈세의 시구가 영화보다 더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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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걸린 영국 도둑과 프랑스 가수가 모로코에서 벌이는 기억과 사랑의 줄타기
너무 일찍 완성된 신화에 영원히 속박된 감독들이 있다. 누벨바그와 무관하게 프랑스영화의 대명사가 된 <남과 여>의 클로드 를르슈도 그렇다. 그 매혹적인 이미지-사운드의 울림에 반했던 이들에게 <남과 여 20년 후>는 차라리 보지 말았어야 할 영화였다. <아름다운 이야기> 로 프랑스영화의 규모를 과시하기도 했지만, 국민감독 를르슈는 <남과 여>의 세계적 감독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중년의 눈높이로 주특기에 복귀한 작품이 2002년 칸 폐막작으로 선정된 <레이디스 앤 젠틀맨>이다. 시놉시스만 보면 이 영화는 20년 뒤가 아니라 2002년의 <남과 여>가 돼야 할 것만 같다. 변장과 허풍의 대가인 영국의 보석털이범 발렌틴(제레미 아이언스)은 삶에 회의를 느끼고 아내를 놔둔 채 혼자 세계일주에 나선다. 프랑스의 재즈가수 제인(파트리샤 카스)은 애인이 동료와 바람를 피우자 우울하게 파리를 떠난다. 둘이 우연히 만난 곳은 모로코. 호텔 바에서 노래하던 제인에게 끌린 발렌틴은 그들 모두 부분기억상실증 환자임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치유와 공감, 사랑과 불륜의 여정이 경찰의 추적과 건망증을 넘나들며 아스라한 줄타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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