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주인공으로 사는 법을 아는 젊은이, <트로이>의 에릭 바나
2004-05-27
글 : 박은영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그가 들어서자, 인터뷰장이 술렁거린다. <블랙 호크 다운>과 <헐크>에서 마주쳤던 그의 얼굴이 너무 평범하다고 여겼던 탓일까. <트로이>의 홍보를 위해 뉴욕으로 날아온 에릭 바나는, 다갈색 곱슬머리와 다부진 체격, 단호한 남성성과 소년의 장난기가 뒤섞인 눈망울로, 첫 대면한 기자들을 가벼운 흥분에 빠뜨렸다. <트로이>의 가장 매력적인 영웅 중 하나인 헥토르를 연기한 에릭 바나에 대한 동료들의 평판은 만점에 가까웠다. 볼프강 페터슨 감독은 그가 아킬레스(브래드 피트)와의 결전 촬영에서 부상당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갑자기 에릭이 쓰러져서 가보니,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는데, 두 시간 뒤에 그가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깐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대선배 피터 오툴은 “아주 훌륭한 청년”이라고 칭찬하면서, 에릭 바나가 ‘인간 복사기’라는 중요한 정보를 주었다. 확인을 원하는 기자들 앞에서, 에릭 바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박수 두번) 자, 누굴 원해요? 말만 하세요.” 그는 올란도 블룸을, 브래드 피트를, 볼프강 페터슨을 똑같이 흉내내, 기자들을 뒤로 넘어가게 만들고야 말았다. 결국 ‘브래드 피트는 어때요?’라는 지겨운 질문이, 에릭 바나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쇼의 주인공이 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다른 배우들이 돋보이지 않는다.
=(당황하며) 정말? (뜻밖에도 실망한 기색으로) 그런 걸 바란 건 아닌데…. 내가 생각하는 <트로이>는 앙상블 영화다. 캐릭터의 개성과 역할이 영화를 끌어가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배우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작업에 임했다. 밖에선 우리가 서로 경쟁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 반대다. ‘함께 만들어간다’는 인식이 강했고, 그래서 서로 존중하고 보좌하면서 작업했다.

-다른 역할이 욕심나진 않았나. 아킬레스도 매력적인 인물인데.
=(단호하게) 아니, 난 처음부터 헥토르를 원했다. 볼프강이 그걸 알고 어찌나 기뻐하던지. (볼프강 페터슨 말투를 똑같이 흉내내며) “정말 잘됐군. 그거 아나? 브래드는 아킬레스를 원하더군. 자네도 아킬레스를 원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자네가 헥토르를 맡아주겠다 이거지?” 헥토르는 아킬레스처럼 타고난 전사가 아니다. 전쟁과 살육을 싫어하면서도, 동생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나간다. 형제애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그의 고결한 여정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고 존경하게 됐다.

-역할을 위해 많은 것을 배우고 준비했다고 들었다.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일대일 대결은 매우 중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8개월 정도 꾸준히 브래드와 ‘합’을 맞춘 뒤에 촬영에 들어갔다. 처음엔 서로를 다치게 할까봐 걱정스러웠는데, 그렇게 조심하다 보니까 제대로 된 액션이 나와주질 않았다. 걱정하지 말자, 다쳐도 괜찮다고 합의한 뒤에야 자연스러워졌다. 얼굴을 베고 다치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위험한 촬영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또 하나. 헥토르는 트로이의 명장인 만큼 말을 잘 달려야 하는데, 나는 말을 타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많이 연습했다. 이젠 말을 너무 사랑한다. (웃음) 아, 그리고 치마 예찬론자가 됐다. 치마가 그렇게 편한 의상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당신은 호주에서 코미디언으로 활동했다. 정극 연기의 어려움은 없나.
=일반 코미디 연기라면 다른 장르로의 점프가 무리일 수 있겠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내가 호주에서 주력했던 연기는 스케치 코미디(배우 몇명이 역할을 바꿔가며 여러 편의 토막극을 소화하는 코미디)인데, 끊임없이 남을 관찰하고 모사하는 것이 필수였다. 캐릭터가 관건인 코미디에 익숙하니까, 진지한 드라마 연기도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할리우드로 건너와 <헐크> <트로이> 같은 대작을 연달아 찍었다. 이제 스타 대열에 올랐는데.
=솔직히 내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식하게 되는 건 이런 프레스 정킷 자리뿐이다. 자기 삶을 자기가 조절할 수 없고, 끊임없이 남의 이목을 신경써야 하는 이들은, 여기 할리우드에도 극소수다. 내가 거기 속하지 않는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다음 영화 계획은?
=<트로이>보다 작은 영화다. 그거 하난 분명하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