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남성 구원에 관한 천진한 판타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2004-05-27
글 : 백상빈 (영화칼럼니스트, 정신과 전문의)

중산층 지식인의 내면 고백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에게 뭔가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그동안 ‘작가주의’의 이면에 뭔가 석연치 않게 숨겨져 있었던 홍상수표 영화의 본성을 제법 정확하게 드러내주는 솔직한 작품이다.

대학 선후배인 헌준과 문호는 과거의 섹스파트너였던 선화를 기억해내고 부천으로 찾아가 각각 그녀와 섹스를 한다. 다음날, 헌준은 문호와 섹스를 했다며 선화에게 화를 내고 가버리고, 문호는 대학 여제자와 여관방에 들어갔다가 남제자에게 들킨 뒤 사실이 공개될까봐 전전긍긍하며 집으로 향한다.

이 단순한 줄거리 속에 홍상수 감독이 녹여내고 있는 복잡미묘한 디테일들은 “역시 홍상수다!”는 감탄사를 유발시킨다. 그러면서 고맙게도 이 영화는 이전 작품들과 달리, 시간이나 기억의 뒤섞인 플롯을 이해하려 머리를 굴릴 필요가 전혀 없도록 내러티브를 평이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 덕분에 필자는 홍상수 감독이 그동안 자신의 작품에서 끈질기게 추구해왔던, 독특한 스타일의 정체를 이 영화에 와서야 비로소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천진난만한 ‘소년’의 섹스판타지

홍상수 감독의 스타일은 일상의 리얼리티에 초점을 맞추는 모던한 경향으로 알려져왔다. 그런데 그가 주목하는 일상은 뭔가 색다른 특징이 있다. 그곳에는 항상 “남녀, 술, 그리고 섹스”가 등장하며 모든 상황은 이 세 가지가 필연적 상호연관을 이루며 전개된다. 그 때문에 마치 이 트리아드로 이루어진 일상만이 홍상수 감독의 관심사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쩌면 그가 만든 모든 영화의 시놉시스는 극단적으로는 이렇게 단 한마디로 요약될 정도로 동일한 것이다. “남녀가 만나서 술 먹고 섹스했다.” 마치 싸구려 에로영화의 줄거리 같은 이 화두가 던져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먼저 편집을 살펴보자.

어느 날 선화는 막 제대한 고교 남자선배를 만나, 강압적으로 어디론가 끌려간다. <장면전환> 선화가 애인 헌준을 만나 강간당했다고 말하자, 그는 선화를 여관으로 데려가 깨끗하게 해준다며 곧바로 섹스를 한다. 문호가 꽃을 들고 선화를 찾아간다. <장면전환> 선화와 문호가 키스를 한다. 선화가 바로 섹스하려는 문호를 거부하며 모두 개새끼들이라고 외친다. <장면전환> 문호가 선화를 찾아가 데이트 신청을 한다. <장면전환> 문호 집에서 둘이 섹스를 한다.

이 편집은 선화가 과거에 헌준과 문호의 섹트파트너였다는 사실을 직설적이고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편집에는 사실 엄청난 비약이 숨어 있다. 두 사람이 섹스에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거치야 할 현실적인 과정이 모두 가차없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섹스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강박적인 편집방식이 홍상수 감독의 독특한 특징인데, 이는 남성이 남녀관계를, 오로지 섹스로만 등치시켜 상상할 때 떠오르는 즉각적인 포르노그래피적 진행을 온전히 그대로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편집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셋이 술을 마시는 장면에 이어, 선화와 헌준, 그녀와 문호의 섹스를 암시하는 장면이 곧바로 연결된다. 또한 문호가 제자들과 술 먹는 장면에 이어 곧바로 여제자와 여관에 들어가는 장면이 연결된다. 이렇게 홍상수 감독은 남녀가 술을 마시게 되면 당연지사 섹스로 귀결된다는 강박적인 테제를 자신의 모든 영화들에서 완전히 공식화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대사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헌준과 자고 나온 선화는 거실에 있는 문호 옆에 가서 앉는다. 그때 문호가 다짜고짜 그녀에게 말한다. “빨아줄래?” 그녀 역시 일언반구 없이 곧바로 팰라치오를 해준 뒤 말한다. “빨아주니까 좋아?” 문호가 여관방 침대가 더럽다고 불평하자 여제자가 그에게 말한다. “선생님 제가 빨아드릴까요?” 그녀 역시 바로 팰라치오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런 외설적인 편집과 대사는 일상의 리얼리티를 그려낸 것이 아니라, 남성의 포르노그래피적 성판타지를 “리얼하게” 드러낸 것이다. ‘아래 도리가 땡기면’ 아무하고나 곧바로 섹스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뭇 남성들의 솔직한 성 판타지를, 홍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속시원히 ‘대리배설’시켜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여태껏 ‘인간=동물의 왕국’이라는 일종의 교양 포르노를 찍어온 셈인가? 대답은 “글쎄요”다. 에로(포르노)영화는 오로지 구매자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며 다른 불필요한 것은 모두 제거된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 연출자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성적으로 흥분하게 되었나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관객의 느낌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라’는 식이다. 바로 이런 점이 홍상수표 스타일의 기묘한 마력이다.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당혹스러울 정도의 ‘천진난만함’(naive)이다. 사회규범에서 일탈한 사춘기 소년의 성 충동이 불혹이 넘은 그에게서 천연덕스럽게 풍겨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아우라하에서 그는 이제 진짜배기 ‘일상의 리얼리티’에 대한 현실풍자를 본격화한다.

자기비판을 수행하는 홍상수

헌준은 매우 비열하고 치사한 놈이다. 선화를 데리고 놀다가 차버리고 외국에 가면서, 사랑한다, 기다려달라고 거짓말을 한다. 술 먹고 선화에게 참회의 눈물을 흘려 섹스를 유도한 다음, 문호와 섹스했다며 화를 내고 떠나가버린다.

문호 역시 만만치 않다. 헌준의 강요로 왔건만, 자기가 오자고 했다고 거짓말한다. 술판에서 여제자에게 성희롱을 일삼다가 남제자가 반발하자 성질을 내며 쌍욕을 퍼붓는다. 여제자와 여관에 가서 발각되자, 대학에 공개될까 겁내며 여제자에게 무마작업을 부탁한다.

헌준과 문호는 현재 한국의 중산층(프티부르주아)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비단 이 영화뿐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작품들에서 홍상수 감독은 ‘중산층 지식인’의 속물근성과 야비함을 구구절절이 표현해왔다. 그래서 그가 그려내는 일상의 리얼리티는 ‘타락한 한국 중산층 지식인의 모습’으로 특화된다. 홍 감독은 이들이 한국 현대사에 무슨 불경한 죄라도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치경제학적으로, 중산층은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항상 동요하는, 박쥐와 같은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런 면에서 중산층 지식인은 이(노동자)도 저(자본가)도 아닌, 정치적으로 불쌍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왜 그의 영화에서는 유독 이들만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일까?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비판을 수행하는 주체인 홍상수 감독 역시 중산층 지식인에 명확히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보여주는 일상의 리얼리티는 일종의 ‘자기비난’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즉 홍상수 감독은 그동안 영화를 통해 어떤 ‘자기비판’을 수행해온 것이다. 그러한 비판의 목적은 물론 ‘정화(깨끗해짐)’일 것이다. 자신의 치사한 생각과 나쁜 행동을 영화를 통해 낱낱이 보여줌으로써 그는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과 모순을 관객에게 간접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용기있는 행동이다. 일찍이 프로이트 선생도 <꿈의 분석>에, 너무나 창피한 자신의 추잡한 꿈들을 과감히 공개하여 정신분석을 창시하였다. 그런 면에서 홍상수 감독의 스타일은 가히 ‘우리시대의 프로이트’라 칭할 만하다. 관객은 그의 영화를 봄으로써 무의식중에 자신의 숨겨진 내면을 샅샅이 탐색하게 된다. 그러다가 의식으로 떠올리기 싫었던 불경한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직면(confront)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홍상수표 영화의 탁월한 정신치료 효과이다.

남성구원의 판타지: 김기덕=홍상수

“여자가 남자의 미래”라면 과연 선화는 헌준과 문호의 미래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선화라는 묘한 캐릭터는 홍상수 감독의 천진난만한 판타지와 자기비판이 만나는 접점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녀는 중산층 지식인의 범주를 멀리 벗어나고 있으며 특정 계급이 명시되지 않은 추상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그런 선화의 주된 역할은 이른바 ‘몸 보시’이다. 선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헌준과 문호에게 아낌없이 몸 보시를 선사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제대한 선배에게 몸 보시를 강제로 당해주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자신을 버렸던, 두 남자가 다시 놀러오자 역시 군말없이 차례대로 몸 보시를 서비스한다. 한마디로 선화는,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아무 때고 원할 때 섹스를 군말없이 제공해주는 너무나 착한 ‘성녀’인 동시에 정조관념이 부재한 ‘창녀’인 셈이다. 그런데 홍상수 감독은 놀랍게도 선화가 남자의 미래라고 한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그 이유를 알려면 김기덕 감독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는 홍 감독과 유사하게 (날것 그대로의) ‘순진함’(naive)으로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최근작 <사마리아>에서는 원조교제를 통해 예의 ‘몸 보시 철학’을 실천하고 있는 여고생이 나온다. 일부 페미니즘 평단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여성들을 괴롭혀왔다. 대체 왜 그랬을까? <섬> <나쁜 남자> <사마리아>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실패한 인생들’이다. 그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기생충 같이 살고 있다. 그들이 여성을 괴롭히는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그녀에게 투사해 넘겨(속죄)버리고 구원을 얻기 위함이다. <나쁜 남자>에서는 사창가에서 일하는 ‘깡패새끼’가 자신이 파멸시킨 ‘창녀’에게서 구원을 찾는다는 발상이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여성은 학대받는 희생양(창녀)이자 동시에 그를 구원해줄 메시아(성녀)로 존재하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여자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여성에게 남성의 허물과 죄악을 감당하고 씻어줄 엄청난 능력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속죄와 구원에 대한 남성의 천진난만한 유아적 판타지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도 속물 지식인 남자 둘은, 몸 보시를 제공하는 술집 여자에게 미래를 찾고 있다. 홍상수와 김기덕, 이 두 감독은 놀랍게도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만 김 감독이 종교적 콘텍스트에 몰두하고, 홍 감독이 사회적 콘텍스트를 애용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두 감독은 (남)성적 천진난만함, 솔직한 자기 고백, 그리고 남성 구원의 판타지가 융합된 스타일을 동시대에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들의 작가주의적 역량이 이러한 독특한 스타일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왜 칸, 베를린 등 굵직한 영화제에서 그들에게 러브 콜을 보내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영화는 무엇보다도 먼저, 현재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남성들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생태학적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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