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 평론가의 ‘홍상수도 나쁜 남자다: 페미니즘의 비평적 딜레마를 응시하기’(<씨네21> 451호)는 늘, 페미니즘 비평의 논쟁 가운데 서 있던 김기덕을 (오히려)옹호하고, 홍상수를, (특별히)홍상수의 신작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격 비평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그러나 비약 혹은 과장되어 있는 면이 많아 그전에 김기덕에게 쏟아졌던 “왜곡의 언어”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비평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중심으로, 김경욱의 언어에 몇 가지 이견의 주석을 달아보고 싶어졌다.
과잉 해석으로 인한 오독
“헌준은 선화를 버리고 유학을 떠난다. 선화를 회상하는 두 번째 남자 문호 역시 섹스하고 나서 그녀를 떠나간다. (중략)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난 애인은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위가 더러워서, 감추어진 애인은 겉으로 보이는 부위가 더러워서 각각 떠난다.”
김경욱은 “감추어진 애인은 겉으로 보이는 부위가 더러워서 떠난다”라는 표현을 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과잉의 정의’이다. 공항장면의 시작에 헌준을 향해 내지르는 문호의 공격적 대사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그들 사이에는 많은 시간과 사연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헌준은 (이 장면들은 모두 과거다) 미래의 문호의 목표처럼, 교수가 되기 위해 이 땅을 떠난다. 헌준에게 중요한 것은 선화가 아니라 사회와 자신이 동시에 원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그러면서 점점 헌준은 짐승이 되어간다). 그래서 헌준은 떠난다. 김경욱의 표현대로 “보이지 않는 부위가 더러워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문호가 선화를 떠난 이유가 ‘선화의 다리털’ 때문이라는 정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오인받은 결과다).
“선화와 똑같이 오럴을 해주었던(그래서 선화처럼 살게 될 수도 있는) 경희는 선화처럼 버려지고, 문호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런 반복은 위험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 홍상수의 반복이 갖는 잔인함이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문호의 여학생이 선화처럼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김경욱의 놀라운(!) 상상이다. 이 문장 안에는 선화의 삶을 모욕하는 폭력의 언사까지 들어 있다. 영악한 홍상수는 선화가 일하고 있는 직장의 내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그녀는 정말 술집을 경영하고 있는가?). 선화의 현재의 삶이 행복한지 불운한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정의내릴 수 없다. 또한, 김경욱은 문호가 마지막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향한다고 했는데, 마지막에 먼저 떠나는 건 문호가 아니라 여학생이다(이것이 정말 중요하다). 결국 택시를 기다리며 나누었던 여학생과 문호의 대화(혹은, 행동) 중에 드러난 문호의 치졸함이 여학생의 심정을 바꾸게 만든 것이다. 김경욱의 말처럼 여학생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놀아난 ‘저질교수’ 문호가 버려지는 것이다. 홍상수의 의도를 완전히 반대의 지점에서 해석하고 정의내린 이 단락은 왜곡의 지점을 너무 무심히 넘어간다.
표면적인 이분법을 넘은 홍상수의 ‘전진’
“그들에게 결국 여성은 일종의 ‘팜므파탈’이다. (중략) 그들은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만, 그 잘못의 원인은 대상으로서의 그 여자 선화(들)에게로 돌려진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선택에 대해 반성할 이유가 없다.”
김경욱의 결론- 마지막 단락 중 김기덕과 홍상수가 모든 잘못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점 또한 동의하기 힘들다. 홍상수는 선화를 남기고, 여학생을 떠나보냄으로써 도망가는 헌준과 버려진 문호의 치졸함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남성을 들여다본다. 그러니까 버려지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며, 헌준이 그렇게 도망침으로써 다시는 선화 앞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불안감에 휩싸여 여학생이 떠난 새벽의 도로를 지키는 문호가 다시는 어떤 여학생과도 관계를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홍상수의 영화가 혹은 홍상수의 여성들이 언어를 빼앗기고 스크린 안에서 고통을 표현할 만한 영역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김경욱의 지적은 일정 부분 공감이 가지만. 그것 때문에 그들이 일방적으로(=성적으로) 희생되었다는 비평은 위험하다. 그것은 김경욱이 주장하고 있는 페미니즘 평론의 딜레마를 악용하고 있는 감상주의적 확대 해석이며, 홍상수의 작품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한 이분법적 인상비평일 뿐이다. 김경욱이 마지막에 말한 것처럼 김기덕이든 홍상수든 페미니즘의 휴머니즘으로 구해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포부도 원대하다. 그러나 그녀의 비평은 홍상수의 여성을 다시, 살해한다. 이 기이한 모순은 달라진 홍상수의 “전진”을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