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전야>를 만들던 25살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뛰는 심장을 가진 아름다운 시인이었다. 자신을 속박하는 종교와 특권에 분노하고, 거침없이 이야기하며,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르주아계급 청년 파브리지오는 바로 베루톨루치였다. 하지만 파브리지오는 같은 계급의 여자와 교회에서 결혼하고 오페라 공연에 참가하면서, 자신이 그토록 저주했던 삶을 받아들인다. 혁명 이전의 시간을 살고 있는 그는 한 인간의 역사가 과거의 연장이며 환경의 산물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고 우린 <혁명전야>를 공허한 울림으로 치부할 순 없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부르짖는 파브리지오가 바랐던 것처럼, 한 인간의 삶이 끝나는 곳에서 다른 이의 생존이 시작되는 것처럼, <혁명전야>는 새로운 인간이 혁명의 시간을 맞이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고 우린 생각했다).
그리고 1968년, (서구에서 흔히 말해지듯) 1848년에 이은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났다. <몽상가들>은 시네마테크 설립자 앙리 랑글루아의 해고에 분노했던 그해 2월의 파리에서 그럴싸하게 시작한다. 하지만 ‘바리케이드의 밤’이 있던 ‘파리의 5월’, 그 핵심으로 뛰어들진 못했다. 열정과 의식은 사라지고 남은 건 패션 하나. <혁명전야>에서 로셀리니와 히치콕과 고다르 그리고 레이를 열띤 어조로 말하던 청년은 영화제목 맞추기의 재미에 빠진 아이들로 바뀌었으며, 전설 같은 영화와 사이키델릭 음악 그리고 혁명 구호는 그냥 말해지거나 보여지고 들려질 뿐이다(그중 압권은 소녀 무세트의 눈물겨운 자살과 철없는 소녀의 그것이 교차되는 장면의 허울이다). 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회고적 태도로 일관하는 <몽상가들>은 낭만이란 위험에 스스로 빠지고 만다.
베르톨루치가 <파리, ’68>을 만든다고 했을 때, 우린 그가 기나긴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몽상가들>은 꿈꾸는 자가 몽상가로 바뀐 결과만 보여준 ‘변신 이야기’였다. <혁명전야>에 나온 오페라 <맥베스>가 에서 ‘주세페가 죽었다’고 외치는 광대와 연결되고, 다시 옛이야기 장면이 <텐 미니츠-첼로>의 에피소드로 이어진다는 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베르톨루치는 진작에 시간의 부재와 기억의 부정, 예술로의 회귀를 꾀하고 있었던 게다. 이용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