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 북인 줄 알면서도 쳐야하는 북이 있다. (쇼 브라더즈 영화 스타일로 비장하게 말하자면) 내가 뿌린 씨앗은 내가 거둬야 한다. 전편을 보고 거품을 물었으니 속편을 보고 침을 닦아야 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Vol.2>는 전편을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영화이지만, 전편과 완전히 다른 속편이다. 그러므로 속편을 볼 때 전편을 본 기분으로 본다면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혹은 이미 당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청엽정의 결투를 기대한다면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만일 피와 시체들로 넘쳐나는 도산검림을 헤쳐나가길 원한다면 그냥 전편을 빌려다가 다시 한 번 더 보면 된다. (지금 인터넷에는 청엽정의 올 칼라(!) 버전이 떠돌고 있다. 그리고 이 총천연색 버전은 ‘그 대목에서’ 편집이 좀 다르다.) 스무자 평으로 쓰자면 전편이 ‘뻥’으로 죽인다면, 속편은 ‘구라’로 죽여준다!
시작하면 1940년대 할리우드 영화풍의 스크린 프로세스를 뒤로 하고 달려가는 브라이드의 비장한 장광설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모든 사건의 시작, 그러니까 국경 근처 엘파소의 작은 교회에서 결혼식 리허설을 하는 장면으로 옮겨간다. 여기서 브라이드와 빌이 만나서 횡설수설을 황홀하게 늘어놓기 시작한다. 거의 기념비적인 대화 장면. 어디서부터가 진담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는 알 수 없다. 이때부터 영화는 귀를 집중해야만 볼 수 있는 대사의 진검승부로 환골탈태한다. 타란티노는 전편에서 필요 이상으로 활극 장면을 질질 끌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필요 이상으로 대화 장면을 한껏 늘여 놓는다. 물론 둘 다 말이 안 된다. 그러나 둘 다 결국은 같은 말이다. 대결의 신화학. 첫 번째 ‘결국’의 형식, 그러니까 (내 생각으로) <킬 빌>은 (샘 페킨파와 세르지오 레오네를 ‘흑인 버전’(블랙 스플레테이션)으로 분장시킨) 서부영화이다.
홀연히 나타난 영웅의 드라마가 홈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네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전편과 속편의 차이는 전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빌의 비밀스러운 한 마디로 예고되었다. “브라이드는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전편이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무자비한 복수전이라면, 속편은 아이를 되찾으려는 어머니의 애절한 여행길이다. 그가 그렇게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방울뱀’ 버드의 소금탄에 맞아 땅에 산채로 묻혀 있다가 기어이 소림사 무술로 자기 묘지를 파헤치고 부활하는 과정으로 구구절절하게 보여준다. 두 번째 ‘결국’의 귀결, 그러니까 이 영화는 어머니의 영화이며, 본질적으로 홈(으로 회귀하는) 드라마이다.
타란티노는 ‘어찌되었건’ 영화라는 계약의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그 다음 그 계약 안에서 반칙의 놀이에 몰두한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그 계약이 왜 타락할 수밖에 없는지의 역사적 필연성을 묻지 않는다. 이 두 편의 기괴한 전·후편은 추락해버린 서부영화의 타락한 계보를 따라가는 ‘무심한’ 여행길이다. 우마 서먼은 멀리는 존 웨인을 두고, 그 (존 포드의) 존 웨인에게서 명예과 책임을 포기한 (세르지오 레오네의) ‘이름 없는 남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경유하여 기어이 허무한 자포자기의 죽음을 통해서만 간신히 유지되는 쇼 브라더즈와 70년대 일본 ‘짠바라’ B급 영화의 영웅주의를 통과하고, 이제 거의 남은 것이 없는 그 멸종된 영웅적 주인공의 자리에 도착한 것이다. 타란티노는 지평선 멀리서 홀연히 나타난 영웅의 드라마가 이제 홈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영웅의 자포자기, 혹은 여성의 자리에 대한 교정. 그래서 사실상 <킬 빌>은 존 포드로부터 가장 멀리 시작해서 신기하게도 더글라스 서크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끝난다. 그건 신화(적 장르)의 타락이다.
<킬 빌>은 후편이 전편보다 훨씬 훌륭하다. 그러나 후편이 주는 실망감은 전편이 주는 저 막가파 천의무봉의 인용이 주는 풍요로움을 포기하고, 결국은 수순을 고스란히 밟아나가는 영화사의 규칙 안으로 얌전하게 들어와 ‘그래봐야’ 할리우드 스튜디오 안에서 벌이는 소동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시켜줄 때 오는 빈곤함이다. 타란티노는 힙합 DJ처럼 영화를 만든다. 전편은 샘플링의 대가임을 확인시켰고, 속편은 리믹스의 천재임을 과시한다. 그러나 그는 힙합의 정신을 잊은 DJ처럼 보인다. 타란티노는 시시하게 ‘올드’ 보이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