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저주>의 ‘탈정치성’을 위한 변명
조지 로메로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자기만의 좀비를 창조한 이후, 좀비들은 조금씩 진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촐한 극저예산영화의 비전문 엑스트라들로 시작했던 이 괴물들은 제작비가 늘고 분장 기술이 발전하고 잔인무도함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무뎌지는 동안 조금씩 능력을 더해갔다. 지금와서 보면 이 장르의 역사는 관객과 좀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군비 경쟁의 역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긴 안 그런 호러영화 서브 장르가 있었던가?
한번 영화들을 훑어보자.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들은 술집에서 몰려나와 끼리끼리 몰려다니던 술취한 시골 동네 사람들 같았다. 물론 주인공들의 생살을 뜯어먹는 엄청나게 무서운 시골 동네 사람들이었지만. <시체들의 새벽>에서 이들은 특별히 진화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공포의 강도는 떨어졌다) 인해전술로 미대륙을 정복할 만큼 엄청난 수의 좀비 대군으로 바뀌었다. 그 다음 영화 <시체들의 낮>에 나오는 좀비들은 머리 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운동도 좀 하고 근육도 불렸다. 폐쇄된 군사 기지에서 군인들을 갈기갈기 찢는 좀비들은 엘리베이터 음악을 들으며 흐느적거렸던 전편의 좀비들과는 다른 사나운 야수성까지 지니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리턴 오브 리빙 데드>의 좀비들은 어떤가? 그들은 아침마다 제인 폰다 비디오를 보며 에어로빅이라도 한 것처럼 민첩하고 빠르다. 세기가 바뀐 뒤 만들어진 와 <시체들의 새벽>의 리메이크판인 <새벽의 저주>에서 좀비들은 빠르고 사납고 분노라는 분명한 감정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더이상 이전 좀비영화들에 나오는 사람 고기 먹는 기계들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를 품고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좀비
많은 좀비 영화팬들은 이런 변화에 실망한다. 좀비들이 무서운 건 그들이 시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속도와 감정을 부여한다면 그들이 끌고 다니는 ‘죽음’의 메타포와 ‘살아 있는 시체’의 아이러니, 그와 연결된 음울한 분위기는 힘을 잃는다. 그렇다면 죽음의 느낌이 빠지고 육체적인 힘만 늘어난 좀비들과 특수효과의 양과 자극만 늘려가는 다른 할리우드 액션영화 괴물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좀비들 역시 영화가 만들어진 당시의 유행과 시대정신을 무시할 수 없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베트남전의 악몽에 시달리던 60년대 미국인들의 무의식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고, <시체들의 새벽>은 70년대의 격렬한 인권운동과 미국 소비사회에 대한 야유조의 태도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시체들의 낮> 역시 레이건 시대의 군비확장과 냉전 공포증, 그리고 당시 열풍처럼 닥쳤던 건강집착증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영화들과 관객의 상호관계도 일방적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로메로의 좀비 삼부작에서 흑인들과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높은 것이 정치적인 의미 속에서 해석될 수 있었던 건 꼭 감독의 의도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엔 그런 설정이 정치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좀비들이 이전의 좀비들과 같지 않다는 것 자체가 기계적인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다른 것이 정상이다. 어떻게 다른가는 여전히 문제가 되겠지만.
<새벽의 저주>를 위한 변명들
이런 시대정신의 상호 작용은 <새벽의 저주>를 위한 첫 번째 변명이 된다. 변명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오리지널영화의 팬들이 리메이크에 가하는 두 가지 비판을 다시 반복해보자. 하나. 리메이크 버전은 원작이 가지고 있던 소비사회에 대한 풍자와 고찰을 찾을 수 없다. 둘. 좀비들이 무드없게 빠르고 사납기만 하다.
이런 비판들은 비교적 정확하다. 실제로 로메로가 원작에서 공들여 묘사한 쇼핑센터 유토피아의 흔적은 리메이크 버전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리메이크의 각본을 가지고 있지 않아 정확한 인용이 어렵지만, 좀비들이 쇼핑센터에 몰려드는 이유를 설명하는 원작의 유명한 대사인 “일종의 본능입니다. 그들이 이전에 누구였던가에 대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는 거죠. 이곳(쇼핑센터)은 그들에게 중요한 곳이었습니다”는 대충 이런 식으로 변형되었다. “일종의 본능입니다. 이곳은 그들에게 중요한 곳이었을 겁니다. 아니면 우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리메이크 버전에서 쇼핑센터는 공짜 물건들이 넘쳐나는 유토피아라는 의미보다는 바깥의 괴물들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요새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좀비에 대한 비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새벽의 저주>의 좀비들은 근사한 최첨단 특수효과에 의해 더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지만 하는 행동은 로메로의 좀비들에 비해 덜 으스스하고 덜 우스꽝스러우며 덜 좀비 같다. 그렇다면 원작을 그렇게 근사한 영화로 만들었던 메타포와 분위기를 날려버리고 멀티플렉스 관객을 위한 자극적인 팝콘영화를 만들었다는 비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풍자가 없는 <시체들의 새벽>이 <시체들의 새벽>인가?”라는 물음에 그대로 답할 필요는 없다. 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고 해서 원작의 모든 것들에 충실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런다면 리메이크 버전은 정직하지 못한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21세기 초의 사람들은 70년대 말의 사람들과는 다른 고민을 하고 다른 관점으로 세계를 본다. 물론 이슈를 조성하는 방법도 다르고 같은 대상을 보는 방식도 다르다. 예를 들어 오리지널 <시체들의 새벽>에서 흑인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높은 건 정치적 의미가 분명했지만 <새벽의 저주>에서 같은 비중의 캐릭터 배치는 더이상 별 의미가 없다. 이제 이 정도의 캐릭터 배분은 비정치적인 일반 할리우드 액션영화에서도 흔하기 때문이다.
<새벽의 저주>는 무정치적인 영화는 아니다. 만약 이 영화가 무정치적으로 읽힌다면 원작의 의미에 집착한 관객이 이 영화와 적극적인 상호작용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건 관객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과 같은 그럴싸한 일반론을 만들어 대입해보는 건 어떨까? 한 영화가 무의미하다면 관객이 그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이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칸을 방문한 배우 제이크 웨버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했다. 프랑스에서는 모두 이 영화의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물었지만 미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고. 우리가 <새벽의 저주>를 탈색된 오락영화로 본다면, 그건 이 영화의 의미를 일부러 해석하기 싫은 미국 관객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다. 그렇다면 두 영화의 차이를 조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예를 들어 주인공들이 쇼핑센터 안에 공들여 쌓은 문명사회에 야만적인 바이커 패거리들이 침략하는 원작과 아둔하고 야만적인 쇼핑센터 경비원들을 정복하고 쇼핑센터에 문명사회를 건설하는 리메이크의 스토리 전개 사이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냉전 공포증을 겪었던 70년대 말의 미국과 9·11 사태와 이라크 전쟁을 겪은 21세기 초의 미국의 차이만큼 분명한 차별성이 존재하지 않겠는가? 아내가 좀비가 되었고 임신한 아기의 정체 역시 뻔한데도 필사적으로 가족을 지키고 유지하려는 안드레의 고민은 분명 원작에는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까? 쇼핑센터 이주민들의 수가 늘어나자 한계상황에 처한 그룹의 갈등이 좀더 본격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는가? 세상이 다 아는 좌파 배우인 사라 폴리가 노동자 계급의 응급실 간호사 안나로 나와 밥맛없는 자본가 좀비를 총으로 날려버린다는 설정은 어떨까? 쇼핑센터 맞은편 옥상에 고립된 총기상이 심심풀이로 유명인사를 닮은 좀비들을 날려버리는 장면은 매스미디어 중독과 총기사건과 관련된 야유조의 농담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빠르고 민첩한 좀비들 역시 꼭 스펙터클과 액션에 대한 관객의 갈망에 기계적으로 반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을 듯하다. 9·11 사태는 매카시 선풍만큼이나 미국인들의 집단적 공포심을 자극한 사건이었다는 걸 잊지 말자. 비행기를 무역센터에 박아버리는 무시무시한 타자들에 대한 공포심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좀비들도 이전의 파워를 유지하는 식으로 안주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들의 눈에 그득한 분노 역시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당연하지 않겠는가?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쇼핑센터에 꽁꽁 숨어 있는 주인공들을 포위하고 으르렁거리는 분노한 타자들의 모습이 과연 철저하게 무정치적인 이미지일 수 있을까? 그런 이미지가 만든 사람의 의도에 따른 것이건 관객의 해석에 따른 것이건 간에. 장르의 고전들이 리메이크될 때, 종종 사람들은 “원작자가 과연 이 작품을 좋아할까?”라고 묻는다. 리메이크 관련 기사들을 충분히 훑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로메로가 리메이크 버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다.
원작을 숭배하는 예의바른 리메이크
하지만 그가 이 영화를 싫어할 이유가 있을까? 특수효과는 더 나아졌고 배우들은 더 좋아졌으며 고어장면들도 강도가 더해졌지만 리메이크영화는 여전히 오리지널 버전의 경건한 오마주이다. 원작의 이름을 망치지 않을 정도로 그럴싸한 질적 수준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결코 원작의 명성을 넘보지 않는 예의바른 영화라면, 원작자가 보기에 거의 이상적인 리메이크가 아닐까? 물론 지금의 시대를 바라보는 리메이크 버전의 관점은 조지 로메로와 같지 않겠지만, 그거야 얼마 뒤에 나올 그의 네 번째 좀비영화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물론 관객이 리메이크 버전을 싫어한다고 해도 특별히 잃을 건 없다. 로메로의 팬들은 맘만 먹으면 여전히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을 근사한 앵커베이 DVD를 통해 감상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