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지켜보자 즐겁게,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의 전지현
2004-06-03
글 : 박혜명
사진 : 정진환

전지현은 변한 것이 없다. 겉으로 보는 한은 그렇다. 검고 긴 머리가 깨끗하고 순수해 보이는 얼굴 주위로 자연스럽게 흩날리고, ‘우리 동네 담배가게 아가씨’ 같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접근 가능한 느낌을 주는 해사함도 여전하다. 영화 속의 그녀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엽기적인 그녀’는 3년 전의 그때와 다를 바 없이 전지현의 몸을 빌려 발랄하게 살고 있고, 화사한 립글로스를 바른 화장품 광고에서,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입고 친구와 길을 떠나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광고에서 그녀의 캐릭터는 계속된다.

하나, 애인같은 소녀에서 아시아 문화 자본으로

섹시하면서도 성적 대상화의 위험을 가뿐하게 뛰어넘고, 도시의 어느 거리에서 마주쳤을 법하게 수수하지만 돌연 눈부시게 모던해지는 전지현의 매혹을 한국의 남녀노소는 아직도 사랑한다. 그리고 미디어는 전지현의 후예들로 넘쳐난다.

언제부턴가 이 매혹은 아시아권에 널리 통용되는 글로벌한 문화자본임이 입증되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한류 스타들 사이에서 전지현은 한국과 홍콩이 체계적으로 주도하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견인차로 나섰다. 한국 싸이더스HQ의 자사인 아이필름이 기획·제작하고 홍콩의 에드코필름이 전액 투자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가 바로 그 프로젝트. 곽재용 감독이 연출하고 중국, 홍콩, 한국에서 동시 개봉하는 <여친소>는 안전하게도 혹은 현명하게도 <엽기적인 그녀>의 잔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중국 내 여론조사의 결과나 주최쪽이 벌이는 다국적 프로모션 소식들은 이러한 시도가 안전하게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증들이다.

이 견고한 비즈니스의 성채에 홀로 높이 세워진 전지현을 만났다. 누각 위의 그녀는 때로 황홀하고 때로 위태로우며 때로 속내를 궁금하게 만든다. 현명하게도 전지현은 그 아득한 거리를 감당할 마음의 비법을 터득하려 노력 중인 것 같다. 덕분에 그녀는 침착해 보인다.

‘현명한’ 전지현의 느낌은 영화 〈4인용 식탁>으로부터 왔다. 대중의 환호는 덜 화려했지만 다소 엉뚱해 보이는 각도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찔러보았다. “자신감은 생긴 것 같아요. 잘했든 못했든, 관객의 반응이 좋았든 안 좋았든. 캐릭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 그런 영화를 더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고요. 배우는 어차피 좋은 시나리오, 좋은 캐릭터를 찾는 거잖아요. 저도 그런 좋은 작품을 만나서 그 속에서 나를 빛내고 싶은 거죠.”

두울, 배우는 자신을 알아주는 감독을 위해 죽는다

안도의 미소를 품은 채 그녀는 <여친소>로 달려가 스타성을 국제적으로 검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전지현은 비즈니스성 작업 안에서 자신을 과도하게 소모하지 않는 방법을 안다. “광고를 찍을 땐 제가 뭔가 새롭게 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어요. 그림 몇장 보여주면서 ‘오늘은 이런 컨셉으로 해주시면 돼요’라고 요구하면 그날 하루는 철저하게 그 컨셉이 되어주는 거죠.”

그러나 전지현에게 <여친소>는 글로벌 비즈니스 이상의 그 무엇이다. 기획사의 아이디어로 출발해서 “캐스팅 과정이 따로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전지현을 위한 철저한 맞춤 시나리오로 출발했지만, 전지현은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이 영화에 사적인 의미를 강하게 부여한다.

“그 사람(곽재용 감독)을 보면 맑은 하늘이 보여요. 그분이 저한테 저하고만 작업하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거든요. 보통은 그런 말 듣고나면 뒤에 가서, ‘에이…’ 그럴 수 있잖아요. 근데 그분이 그런 말을 할 때는 정말 진심으로 느껴지고, 그 마음의 뿌리에 다른 뿌리가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감독님이 이런 얘기도 하셨었어요. ‘나는 너를 표현해내고자 이 세상에 왔고, 너는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굉장히 영화 대사 같은 말인데 그것보다 더 멋있는 말씀도 많이 하셨거든요. 근데 감독님은 저를 위해 진심으로 얘기하신 거예요. 정말로 저를 잘 알고 저를 생각해주시는 분이세요. 그런 분을 위해 제가 뭘 못하겠어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죠.”

세엣, 초심으로 돌아가 진짜 나를 대면한다

전지현은 <여친소>가 <엽기적인 그녀>의 상업적 후예라는 주변의 시선을 강하게 부인한다. “비슷하다고요? 그래요? (갸우뚱) 물론 그렇게 보실 수도 있는데요, 이번 영화는 <엽기적인 그녀>하고는 전혀 다른 영화고요, 그 자체로 충분히 완성도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물론 <엽기적인 그녀>가 없었다면 미완성으로 남을 부분도 있었겠지만, 무작정 그 영화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힘이 있다는 거죠. 보시는 분들의 비교는 두렵지 않고, 저희가 바보같이 쫓아가는 입장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분명히 달라요. 제 주위의 친구들은 자기 나이에 맞게 사회에 적응해가면서 배우지만,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해온 저는 여행을 통해서 훈련을 하는 것 같아요. 낯선 곳에서 혼자 지내고 있으면 제가 아직도 부족하다는 걸 많이 느껴요. 여기선 모든 게 갖춰져 있고 내 이름 하나만으로도 넘어가는 게 있는데, 거기선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요. 초심으로 돌아가서 맨손으로 맞닥뜨리는 거죠. 아, 이게 진짜 나구나.”

배우로서 어쩌면 직업적으로 통과했을 수도 있는 6개월여의 <여친소> 작업을 “최고로 환상적인 연애 같았다”고 표현하며, 그 과정을 자신의 내적 변화와 성숙에 연결시키는 이십대 초반의 여배우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 지금이 제 10년 뒤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거든요. 위를 향해 올라가더라도 항상 맨 아래를 내려다봐요. 저는 지금에 만족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냥, 사람들의 반응이 언제까지 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떤 추세가 있고 그 속에 제가 있는 거지, 제가 그걸 이끌어간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그래서 저는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나중에, 제가 출연했던 모든 작품들을 다 펼쳐놓고 얘기해도 괜찮을 그때에 더 큰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막연한 덩어리에 불과해 보였던 전지현의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갈라지면서 승부수도 다양하게 던져지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의 전지현은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기보다는 조금씩 변형을 가하면서 ‘브랜드 이미지’를 지속적이고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리뉴얼한 경우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엽기적 코미디는 배제하는 대신, 여배우의 아름다운 감정선을 드러내줄 수 있는 슬픈 멜로의 함량을 높인 <여친소>의 치밀함이 바로 그것이다. <타임>의 인터뷰까지 마친 전지현은 지금 브랜드 가치의 확대재생산과 이미지의 족쇄에 발목잡힌 배우라는 아슬아슬한 모험의 도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보는 이로 하여금 “지켜보자, 즐겁게!”라고 말하게 만드는 배우가 전지현이다.

스타일리스트 이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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