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니먼(60)이 내한한다. 오는 6월8∼9일 LG아트센터에서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과 <프로스페로의 서재>,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연주되며, 베르토프의 무성다큐멘터리 <카메라를 든 사나이> 상영에 맞춰 음악이 연주된다. 클래식 음악가이며 10년간 음악비평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니먼은, 무엇보다 70여편의 필모그래피를 가진 영화음악가다. 영국 왕립음악학원에서 피아노와 하프시코드 및 음악사를 공부하고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음악학을 전공한 그의 음악은, 정통 클래식 음악의 미학과 모더니즘적 감수성이 결합돼 있어 우아하고도 현대적이다. 니먼의 음악세계는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속에서 특히 돋보이는데, 두 사람은 지금까지 20여편을 함께 작업했을 만큼 서로에게 창조적인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예술가적 동지’다. 그의 음악을 만나기 전에, 대중음악평론가 성기완씨를 통해 마이클 니먼과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이번 콘서트에서 당신은 음악과 영상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바로 당신의 콘서트가 열리는 그 장소에서 2003년에 필립 글래스가 비슷한 시도를 했다. 이처럼 영상과 음악의 결합이 빈번해지고 있는데 당신의 이유는 뭔가.
나는 지금까지 영화의 이미지와 내러티브에 음악을 덧붙이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감독이 나에게 사운드트랙을 써달라고 요청할 땐 고의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했고, 내가 다른 목적으로 쓴 음악을 나와 상의없이 감독이 임의로 쓸 땐 우연히 그렇게 돼왔다. 영화음악을 할 때 작곡가들은 음악적인 것에서 비음악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를 염두에 두고자 한다. 그래야만 아주 우연한 순간에 우연한 음악을 넣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내가 피터 그리너웨이와 작업한 것은 행운이었다. 그의 영화에서 나는 우연한 순간들 속에 단순히 우연한 것 이상의 음악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한편의 완성된 영화를 작업하면서 그 영화 속에 들어갈 음악의 위치와 의미에 대해 감독에게 방해받지 않고 곡을 생각해낼 수 있다는 것 역시 거부할 수 없는 좋은 기회다.
당신 음악은 굉장히 폭이 넓다. 그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이 당신 음악의 넓은 진폭에 균형감각을 부여하는지 궁금하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나 스스로 반복하지 않고 동시에 개성도 잃지 않으면서 나의 음악적 어휘, 음악적 호기심, 음악적 구성과정 등을 지속적으로 확장해갈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게는 자극이 된다. 나의 개성도, 당연히 이런 과정을 통해 변화하면서 풍부해진다.
이른바 ‘전위적’(avant-garde)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음악들에 대해 대중은 한편으로는 동경을, 다른 한편으로는 거북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존 케이지 같은 사람의 전위음악은 때로 접근 가능성 자체를 너무 열어놓음으로써 거기에 다가가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당신의 음악도 ‘전위적’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나.
나는 내 음악이 ‘아방가르드’라는 점을 부인한다. ‘아방가르드’는 전후(戰後) 클래식 음악사에서 아주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다. 사실 나의 음악은, 새로우면서도 대중적인 음악(제한적인 관점에서)을 만들려고 하는 다른 동시대 음악가들과 비교해볼 때 명백하게 반(反)아방가르드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늘 맥락의 문제라는 게 있다. 팝음악이나 댄스음악의 다른 형태들과 비교했을 때는 내 음악이 아방가르드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어떤 종류의 댄스음악들이 진정한 아방가르드보다 훨씬 아방가르드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1970년대에는 작곡가로서보다는 음악비평가로 더 정력적인 활동을 했던 것 같다. 요새도 글을 많이 쓰나? 글쓰기와 작곡, 현장에서의 연주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해줄 수 있는지. 그것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가.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에 대해 오랫동안 글을 쓰고 난 뒤부터는, 내 음악에 대해서도 마치 남이 만든 음악인 양 규율을 들이대고 외부자의 시선으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내 음악에 대해 내린 나의 비평적 결론은 당신에게 절대 말해줄 수 없다! (웃음)
<카메라를 든 사나이>
영화음악처럼 기능(function) 자체가 구체적인 음악을 할 때와 순수하게 음악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음악을 할 때 많이 다르다고 느껴진다. 음악가로서 그 두 영역을 동시에 하는 것 자체로부터 영감을 길어온다는 감도 받는다.
물론 다르다고 느낀다. 영화와 관련해 크리에이티브적인 결정들은 다른 사람들, 감독 혹은 심지어 프로듀서의 영향까지도 받기 때문이다. 반면에 콘서트나 다른 무대 작업을 할 때는 어느 정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여기서 ‘어느 정도’라는 말은, 예를 들어 오페라 같은 경우 그 안에 이미 특정한 주제가 있기 때문에 그 주제에 한정해서만 자유로운 선택도 가능함을 의미한다. 반면 현악4중주는 특정 악기 4대만을 동원한다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덜 제한적이다!).
특히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과는 둘도 없는 단짝처럼 보인다. 그와 작업하면 즐거운가? 서로의 비주얼과 사운드에서 두 사람이 많은 영감을 주고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상당 부분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나 분위기의 측면이라기보다 구조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그는 내가 이미 편집된 영화에 맞춰 곡을 쓰게 하지 않고, 기본적인 길이의 곡을 자율적으로 쓰게 한 다음 그 곡들을 기준 삼아 영화를 편집하는 데 참고했다.
영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을 보면 18세기 영국의 바로크 음악, 특히 헨리 퍼셀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느낌의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이른바 ‘바소 오스티나토’(basso ostinato)는 전통적인 유럽 음악과 현대적인 미니멀리즘을 연결하는 고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은 이처럼 옛날 것들과 오늘날의 것의 연결고리를 체계적으로 찾아내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그 동기는 무엇인가. 또 앞으로의 방향은.
그저 본능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유럽 클래식 음악의 전통 안에서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모니 감각이 강하고 박사 과정에서 반복 구조의 과거 음악들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그같은 폐쇄적인 하모니의 양식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미국식 미니멀리즘의 명백한 영향 아래 작곡하기 시작하자, 자기반복과 자기규제의 미학을 지닌 이 절제된 양식들을 향한 내 본능을 따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됐다. 그리고 나서는, 음악적 요소를 층층이 겹치는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앞서 말한 화성적 양식의 지속적 동일성과 음악 요소를 쌓는 작업에서 나오는 지속적 변화를 결합한 음악이 그러므로 내게는 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지금도 그 점 변함이 없다.
요새는 미니멀한 음악의 전성시대인 것 같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이른바 ‘테크노’, 즉 대중적인 일렉트로닉 음악인 것 같다. 대중적인 일렉트로닉 음악들은 한편으로는 매우 단순하고 말초적이지만 다른 한편 전위적인 사운드를 커버하고 있고 그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영국은 그와 같은 대중적 일렉트로닉 음악의 메카인데, 당신도 그런 음악에 관심이 있나.
지난 1965년 5월, 루마니아의 포크뮤직을 공부하러 루마니아에 다녀온 이후 포크뮤직에 관심을 가져온 것은 맞다. 일렉트로닉 음악은, 이는 정말 나이의 문제인데, 관심이 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