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하류인생> 제작한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 인터뷰
2004-06-04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하류인생? 우린 그 축에도 못꼈어”

임권택 감독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은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의 젊은 시절 이야기와 매우 닮아있다. 사춘기에 고아처럼 내던져진 뒤 주먹판에 들어갔다가 4·19, 5·16의 격변기를 겪으며 영화제작자, 건설업자로 변신하는 주인공 태웅의 삶엔 그 시대의 비리, 협잡, 야만스런 권력의 횡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격변기에 살아남아 자수성가하기까지의 이 지난한 여정은, 영화제작자와 건설업자의 순서만 바꾸면 바로 이태원 사장의 것이 된다.

그는 70년대 혹독한 검열 아래 신음하던 한국 영화를 80년대에 부활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제작했던 임권택 뿐 아니라 배창호, 장선우, 김유진, 김홍준, 이명세, 송능한의 영화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영화 전성기는 불가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과 돈 사이의 줄타기를 버티면서 거친 하류를 거슬러올라온 그의 생존본능과 직관은 한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는 성취를 이뤄냈다. 그의 자수성가는 자기 집안 뿐 아니라 한국영화를 일으켜 세웠다.

“하류인생? 우린 그 축에도 못꼈어”

“(영화 <하류인생>이) 진짜 내 얘기면 엄청나게 재밌지. 그건 마구잡이로 가야하는 거지. 근데 한번 해서 또 할 수도 없고.… 임권택하고 오래 생활하다 보니까, 서로 옛날 얘기 많이 하게 되잖아. 그걸 담아놓고 있었겠지.”

<하류인생>의 태웅의 삶도 마구잡이인데, 이태원 사장은 자기 얘기는 더 마구잡이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야. 누가 나한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돈 버는 거야. 그것 밖에 비전이 없었던 사람이야. 시대는 무슨 시대. 이런 세상이 올 줄 정말 몰랐지. 입에 총을 밀어넣는 시대였어. 뭘 바꿔보겠다는 놈들이 내가 보기엔 날샌 놈들이었지.” 자기 삶이 고상하게 포장될 가능성을 이렇게 봉쇄해 놓고 말을 시작했다. (거침 없는 그의 말투에 서로 워낙 많이 웃어서 인터뷰 기사에 흔히 쓰는 (웃음) 표시는 생략한다.)

“하류인생은 그래도 축에 끼는 거야. 우리는 그보다 못했어”

이 사장은 1938년에 상당한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평양에서 여러 사업을 했고 서울에도 집이 있어 미동초등학교를 다녔다. 13남매 중에 서자였던 그는 어릴 때 친모가 집을 나간 뒤 설움을 겪었지만, 정작 시련은 6·25가 터진 뒤 피난중에 길을 잃고 가족과 떨어지게 되면서부터였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좌판 벌여놓고 남들 훔쳐온 물건 팔다가 형을 만나 간신히 중앙중학교에 갔고, 졸업 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선 일산, 의정부 등지에서 열리는 5일장에 물건 나르는 일을 했다. 미군들 상대로 파는 그 물건들을 자신이 직접 도매하면서 돈을 좀 벌자 고등학교 가자는 결심을 했다. 축구를 잘해서 배재고 축구부를 거쳐 축구가 강한 동북고로 전학갔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그 학교에서 공만 차고 수업은 한번도 안 들어가다가 졸업 직전 “우리, 그래도 교실엔 한번 가보자”고 주동해 다른 축구부원들과 같이 한 시간 교실에 앉았다가 졸업했다.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학이 동북고 축구부 전원을 스카웃했다. 입학금은 면제였는데, 수업료는 내야 했다. 그 돈이 없어 그 혼자만 그 학교에 못 갔다. 암울하던 그때, 주먹 조직인 명동 신상사파에서 불렀고 그는 건달이 됐다. “나 길바닥에 있었어. 길바닥에서 많이 잤고. 그땐 아무도 내게 관심없었어. 밥 주는 놈, 돈 주는 놈 없고. 세상이 다 부정적으로 보였고. 다 밉고. 죽이고 싶고. 덤벼라 이거였지. 아직도 그런 애들 많아. 그들을 누가 나무래. 굶는 데 도둑질 안 하는 게 병신이지. 지가 죽는데. 어쩌다가 결혼은 빨리 해서(24살에 결혼) 애도 있어. 어떻게 해. 막가파로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야.” 건달계를 말할 때, 그 냉정한 말투는 한편의 누아르영화다. “거기(건달조직에) 의리 없어. 그거 사기야. 영화가 미화시키는 거지. 지나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들 하고 있었지. 영화에선 건달이 더러 약한 놈 편들잖아. 약한 놈 편들지 않고 돈 주는 놈 편들어.”

건설업, 중앙정보부, 영화배급

5·16이 나고 주먹조직 두목들이 잡혀갔다. 건달짓도 하기 힘들어졌다. 조직에서 만난 한 선배를 통해 군납구조에 눈을 뜨게 됐고, 공사 납품하는 판에 끼어서 공사 따주고 커미션받다가 태흥기업이라는 회사를 인수해 사장이 됐다. 그게 67~68년, 사장이 하는 일이 중앙정보부 등 권력실세에게 돈 찔러주고 공사 따는 것이었다. “120만달러짜리 큰 공사가 있었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직접 만났다고. 이제 내거다 했는데 더 높은 권력 실세와 인척이던 기업에서 뺏아간 거야. 그때 중앙정보부 들어가서 <동아일보>에 다 찌르겠다고 고함쳤지. 뒷탈이 없었던 게 나중에 짜투리 35만달러짜리 공사 세개를 타협하며 받았거든.”

73년에 의정부에서 빌딩 운영하던 친구가 망했다. 자신이 인수해주지 않으면 거덜날 판이었다. 배재고 다닐 때 돈 없던 자신에게 빵사주고 영화 값내주던 친구였다. 그걸 인수했더니 거기에 극장이 있었다. “정보부 애들 만나는 것도 힘들”었던 그는 영화배급을 시작했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제작은 꿈꾸기 힘들었다. 그때 영화법은 영화사를 20개로 제한하고 있었다. 이 20곳에 한해 1년에 한국영화 네편 만들면 외국영화를 수입하게 해줬다. 한국 영화의 상당수가 건성으로 만들어졌고, 제작자들은 외화 수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개판이었던 거지. 나도 개라면 개인데, 안개처럼 지냈지.” 84년 태창영화사가 망하게 생겼다. 이 사장도 큰 돈이 물려있었다. 내친 김에 8억원주고 영화사를 사서 이름을 태흥영화사로 바꿨다. 선택된 20명 안에 들어간 것이었다. 재미 좀 보나 싶었는데 86년에 영화법이 바뀌어 아무나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됐다.

임권택

“지(임권택 가독)나 나나 친구가 없어. 그래서 붙어다니기도 했고. 이제는 꼴보기 싫어서 같이 안 하려고 해도 못해. 남들이 욕할까봐.” 이 사장보다 2살 위인 임권택 감독도 어릴 때 고생한 것으로 치면 이 사장 못지 않다. 배고픔의 슬픔을 절감했던 둘은 누구를 만나든 밥 먹자고 한다. 또 건강 걱정을 안 한다. “우리는 아무 거나 먹어도 소화가 돼.”

영화제작에 나선 뒤 이 사장이 처음 시도한 영화가 임권택 감독, 김지미 주연의 <비구니>였다. 기생이 절에 들어가 해탈한다는 내용인데, 절에 들어가기 전에 정사장면을 불교계에서 문제삼고 나섰다. <비구니>는 엎어졌지만 둘의 인연은 계속됐다. “제작 나서면서 그랬어. 남들 못해본 것 하자. 칸영화제 한번 가보자. 그때 외국에서 주목하는 감독은 이두용, 임권택 둘 뿐이었거든. 이 둘을 데리고 가자. 그런데 86년에 영화법 개정되니까 이두용이 스스로 제작에 나선 거야. 그리곤 임권택 하나 밖에 안 남았지.”

이 사장은 임 감독과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거쳐 공전의 히트작 <장군의 아들>을 찍었다. “작품성, 해외영화제 이런 거 의식하지 말고 찍자. 그게 <장군의 아들> 인데 손님이 50만명을 넘었어. 원래 2편은 김영빈한테 시키려고 했는데 50만명은 대단한 거거든.(<겨울여자>가 58만명을 넘긴 뒤, 수년 동안 이장호·배창호의 히트작들도 47만~48만 선을 못 넘고 있었다.) 다시 임권택이 했지. 그게 3편까지 가면서 5년을 넘기니까 해외영화제에선 임권택을 잊어버린 거야. <서편제>는 나중에 보니까 칸에서 보지도 않았어. 다음 영화 <축제>를 칸이 경쟁부문 아닌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가져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도로 가져와, 하산이다’ 그랬지. 그런데 욕심이 끓고 있는 거야.” 그 욕심 끝에 2002년 <취화선>이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는 작품성

80~90년대에 자신의 표현으로 ‘코리언 마이더스 핸드’였던 그는 <춘향뎐>부터 계속 흥행부진에 내몰렸다. <하류인생>도 흥행이 좋지 않다. <춘향뎐>은 “자기 돈 가지고 영화 만드는 게 제작자지, 요즘 제작자는 다 제작부장이야”라고 말하는 그가 처음으로 남의 돈 투자받아 찍은 영화다. <춘향뎐>에 투자한 미래에셋은 <취화선>에도 3억원을 미리 투자했다. 그러나 시놉시스를 보고는 투자를 중단했다. “그랬겠지. 이거 또 칸 타령하겠구나. 돈 안 되겠다. 안 그러겠어” 이 사장이 자기 돈으로 <취화선> 세트 짓고 촬영 시작할 때 강우석 감독 겸 시네마서비스 사장이 찾아왔다. <취화선>에 이어 <하류인생>까지 시네마서비스 전액투자로 찍었다. “강우석한테 미안해 죽겠어. 두개씩이나. 이게 뭐야. 남의 돈 까먹는 거 이거 힘들어. 엊그제 전화했지. ‘면목 없이’ 했더니 ‘빨리 다음 거나 준비하자’ 그러는 거야. 말을 그렇게 하니까 고맙지.”

<춘향뎐> 이후 4년 동안 한국 영화계는 많이 변했다. 관객 1천만명 시대를 맞았고, 제작비 규모가 커져 자기 돈으로 영화찍는 제작자는 사라졌다. “관객 많이 들었다고 꼭 좋은 영화 아니잖아. 문제는 질을 키워야 하는데.… 흥행물도 나와야 하지만 그것만 하면 영화는 없어져. 작품성, 예술성있는 게 나와야 해. 칸 영향 받아서인지 나는 요즘 작가주의 영화가 좋아지더라고. 나부터 열심히 해야지. 송능한 감독 다음 영화의 시나리오가 조금 있으면 나오거든.”

상품은 내 것, 작품은 감독 것

이태원 사장은 제작자의 역할을 이렇게 말했다. “감독은 자존심밖에 없는 자들이야. 제작자가 감독하고 단 둘이 앉아서 설득시킬 능력 있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도움이나 주는 거야. 나는 감독들한테 영화 가지곤 뭐라고 안 해. 상품은 내 거지만, 작품은 감독 거다, 그런 마인드가 있어요.” 다음은 이 사장이 들려주는 제작 뒷얘기.

<개그맨>(88년)

원래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을 내가 하려고 했어. 그런데 미국에서 찍으려면 달라화가 있어야 하잖아. 그때 외환거래법이 1만달러 이상 못 가져나가게 했단 말야. 그러니까 환치기를 해야 하는데 그때 <비구니> 엎어져서 여의치가 않았어. 그래서 다른 제작자가 했지. 거기서 <황진이>까지 했는데 이 영화를 보니까 너무 속이 상해. 황진이를 예수처럼 찍은 거야. 배창호랑 이명세랑 불렀지. 그때 둘다 교회 다녔거든. 니네 둘이 같이 다니면 안 돼. 명세한테 그랬지. 너 떨어져. 내가 입봉시켜 줄께. 그래서 <개그맨>을 한 거야.

<경마장 가는 길>(91년)

80년대초에, 정부에서 영화 제작자들에게 내려보낸 지침이 있어. 이런 애들 쓰지 말라고. 장선우, 여균동, 정지영…. 그걸 명단을 내 책상에 붙여놓고 있었지. 나는 사실 출신이 부르주아인데, 또 나는 도둑놈인데, 이상하게 나를 의심하는 눈으로 보는 그런 놈들이 좋아. <경마장…> 소설은 두세장도 보기 힘들더라고. 똑같은 거 되풀이하고. 그런데 이렇게 좋은 영화로 나오더라고.

<미지왕>(96년)

난 열받을 때 사건이 나. 그때 아마 왜 늙은 애들 영화만 하냐, 젊은 애를 안 키워주냐, 나한테 그런 압력이 있었던 것같아. 그래서 몽땅 신인들로 가보자. 감독, 촬영감독, 조명, 배우 다 신인으로 가자. 그 현장이 너무 재밌었어. 그런데 그 영화는 시기적으로 좀 빨랐어.

<세기말>(99년)

그땐 시나리오 작가가 몇 없었어. 송능한은 시나리오 정말 잘 쓰지.(<태백산맥>의 시나리오를 썼다.) <넘버 3>(송능한 감독 데뷔작)가 청룡상 신인감독상을 받은 거야. 그 뒷풀이 자리에서 신문사 사람들 한테 ‘가뜩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없는데 상 주면 작가는 누가 하냐’고 고함고함 질렀지. 영화도 안 보고서. 그래놓고는 <넘버 3> 비디오를 봤거든. 이게 코미디를 넘어서는 걸작이야. 바로 전화했지. 너 빨리 와. 그리고 <세기말>을 찍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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