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로 시작해야 하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그 이야기.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세계 최고의 미녀 헬레네와 사랑에 빠져 무모한 도피를 감행한다. 헬레네의 남편이자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레오스가 분노에 떨며 형 아가멤논과 기타 그리스 왕들을 규합하여 트로이를 정벌하고자 머나먼 길을 떠난다. 여기에 반인반신 아킬레스와 용사 헥토르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맞수로 등장하고, 이쪽에서 하나가 죽으면 앙갚음으로 저쪽의 또 다른 하나도 죽어야 하는 끔찍한 공방전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목마가 등장한다. 그 안에 적군이 숨어 있는 줄도 몰랐던 트로이인들의 천진난만함은 결국 종족의 비참한 몰락을 야기하고, 트로이라는 국가는 영영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볼프강 페터슨은 이 장대한 이야기를 2시간40여분의 러닝타임 안에 숨가쁘게 담아내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세심한 축복
이런 종류의 거대 서사- 스펙터클- 영화들이 다다르고자 하는 지점은 하나일 것이다.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혹은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어떤 존재를 가능한 한 그럴듯하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하고 싶다는 오감 체험으로서의 스펙터클에 대한 욕망, 그 박진성에 가장 가깝게 근접하고자 하는, 결코 이카루스의 비극으로 끝장나지 않으려는 영원한 갈증 말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숭고함의 근원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롱기누스의 <숭고에 대하여>를 빌려오자면, 사고와 현실세계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숭고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오랫동안 문자에 대해 ‘패자’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현대에 이르러 시각예술(특히 비구상 미술)은 재현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포기했다. 즉 묘사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숭고함의 한 측면을 반영하기에 이르렀다. 그에 비하면 영화는 오래전 미술이 포기했던 고전적인 의미로서의 숭고함에 여전히 가닿으려 하는 유일한 장르일 것이다. 볼프강 페터슨의 <트로이> 역시 자신이 느슨하게 기반하고 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드> 등의 숭고한 수사학으로 채워진 문학작품에서부터 그 뿌리를 명백히 하고 있다. 트로이의 유물이 발굴되기 전까진 허구라고만 여겨졌던 ‘문자들’을, 이번에는 캔버스의 틀과는 비할 수 없이 거대한 화면 위에 가시화시킴으로써 특정한 리얼리티를 획득하려는 것이다.
숭고함과 그 체험의 고전적 정의에 대해 설명하라고 한다면 가장 단순하게는 칸트의 ‘단적으로 큰 것’, 즉 인간의 오성과 지각으로 붙잡을 수 없는 어떤 압도적인 대상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과 불쾌감,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감 등이 결합된 어떤 불균질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트로이>가 지향하는 숭고함은 당연하게도 일단 크기로 대변되는 스펙터클에서부터 근원을 더듬어 찾아야 한다. 트로이를 침략하는 5만명의 그리스 연합군, 그들을 싣고 푸른 심해를 건너는 수천대의 배, 혹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일컬어졌던 트로이의 거대한 성벽, 트로이를 지키는 수호신인 아폴론의 석상, 트로이를 결정적으로 멸망시키는 목마…. 시인의 입과 손을 빌려서만 가능했던 모든 상상력이 테크놀로지의 세심한 축복 안에서 행복하게 완성된다. 인간의 수를 마음대로 불릴 수 있는 CG와 갖가지 미니어처, 대상의 크기를 왜곡하고 조절할 수 있는 ‘눈속임’으로서의 촬영기법 등등. 현대의 모던한 배우들과 ‘지금 이곳’의 풍광들은 감쪽같이 고대 3200여년 전의 그때 그 사건으로 탈바꿈한다(그런 의미에서 <트로이>는 여타의 고대 액션 서사물보다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비슷한 위치에 놓이는 게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바그너적 숭고함과 결합된 옛이야기
여기서 ‘독일인’ 볼프강 페터슨이 그리스 신화를 토대로 한 이 전쟁 서사물을 게르만 신화의 어떤 특정 부분과 자연스럽게 결합시켰다고도 볼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안인희가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에서 지적했듯이, 19세기 독일에서 바그너의 오페라는 오늘날 블록버스터영화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대중적 예술 장르였다. 그녀는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경유하며, 게르만 신화에서 비롯된 바그너의 작품들(<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파르지팔>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의 특징으로 ‘유기적 조직 능력이 떨어지고 특별한 목적도 없이 전승된 수단들을 남용하며 가장 작은 단위들의 힘이 지나치게 강한 것’을 꼽는다. 죽음의 절대적 필연성과 영원한 구원으로서의 사랑, 또 다른 신세계의 탄생을 위해서는 이전 세계가 붕괴해야 하는 순환론적 세계관 등을 데카당스하게 그려냈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음악 자체보다도 무대효과와 관객의 반응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했기 때문에 거대 양식을 선택했던 바그너의 노련한 연출 덕분에 그의 작품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고, 19세기 이래로 독일인들은 ‘바그너에 의해 해석된’ 게르만 신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 해석틀을 적용한다면 <트로이> 역시 그 그늘에서 특별히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즉 이 영화는 그리스 신화의 간접 체험담이라기보다는 바그너적인 게르만 신화의 선정적이고 감성적인 측면과 결합된 버전의 옛날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신들의 황혼
신전을 접수한 아킬레스가 아폴론 신상의 목을 간단히 베어버렸을 때, 트로이인들은 신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들이 화살을 쏠 줄 안답니까?”라는 헥토르의 분노에 찬 절규가 헛될 수밖에 없었던 건 ‘바그너적인’ 숭고함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리오타르의 표현대로 ‘낭만주의, 달리 표현하자면 근대성-모더니티가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은 숭고함이라는 이름하에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트로이>의 서사로부터 올림포스의 신들이 추방된 건, 이 영화가 재현 불가능한 것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을 드높이 찬양하는 숭고함의 고전적 의미, 합리주의와 낭만주의가 맞닿을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한다고 가정할 때 필연적이다. 트로이 전쟁은 어떤 초현실적인 힘이 개입된 게임이 아니라 인간의 질투심과 욕정이 빚어낸 거대한 비극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 진화의 한 과정이다. 신에게 바치는 숭고함이 끼어들 자리는 여기 없다. 신이란 그 형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존재하게 된 것일 뿐이라는 허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신상들은 힘없이 추락한다.
이 순간 <트로이>는 피상적으로나마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마지막 장 제목인 ‘신들의 황혼’, 즉 라그나로크에 비슷하게 다가가게 된다. “신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죽거든. 언제나 마지막 순간을 살기 때문에, 그래서 삶이 아름다운 거야.”(아킬레스)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싸움, 그것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무자비하고 빼어난 초인인 아킬레스가 허무하게 죽어가는 라스트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이 땅엔 온전히 인간들만이 존재하게 된다. 인간이 싸우고, 인간이 죽고, 인간이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만들어가는 역사. 신화를 기반으로 하되, 신을 추방함으로써 온전히 이 모든 숭고함이 인간의 산물이었으며 인간이 살아내고 감내해야 할 몫임을 천명하는 인간의 목소리.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단점으로 곧잘 지적되는 ‘원작에는 있던 신들이 사라진 것’은 분명한 의도가 개입된 지점이다.
덧붙임. <트로이>의 첫머리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목소리는 오디세우스의 그것이다. “사람은 영원을 갈구하기 때문에 삶의 흔적에 집착한다. 훗날 그들이 우리를 기억해줄까, 우리가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랑했는지….” “기억해 다오, 내가 헥토르와 함께 싸웠고 아킬레스와 함께 살았음을….” 살아남은 자의 음성은 찬양과 축복으로 들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질없이 처연한 욕망으로 충만하다. 역사에 기록될 전쟁에서 이름을 남김으로써 불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영웅의 욕망을 되풀이 선언하는 <트로이>의 테마를 더욱 강조하는 건, 죽음으로써 영웅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 아니라 결국엔 살아남아 후대로 이야기를 전한 자의 음성이다. 참고로 호메로스의 다음 작품은 <오디세이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