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로 걸어들어오는 송윤아의 모습이 섬뜩하다. 미용실에서 머리와 화장을 만지고 오는 길이라는데, 검고 긴 머리채를 늘어뜨리고, 양손을 위로 약간 쳐들고 있다. 나 무섭지? 하고 겁이라도 주려는 품새다(알고보니 매니큐어를 말리는 중이었다). 하루 전 종영한 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여운과 피로를 털어내지 못했다는 송윤아는 조금 시무룩해 있다. 그런데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휴대폰이 울리자, 하이톤의 낭랑한 목소리로 스튜디오를 제압해버린다. “혼자 술마셨다고? 왜 그러구 살아? 응?” 친구와의 장난스런 수다 한판(알고보니 <야심만만>에 출연하면서 친구가 된 김제동과의 통화였다). 조금 전까지의 그 신비롭고 도도한 아우라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카메라 앞에 서서, 취재 수첩을 사이에 두고, 송윤아의 얼굴은 여러 번 달라졌다.
송윤아는 언제부턴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배우가 됐다. 참하면서도 친근한 얼굴로 브라운관을 서성이던 그가 트렌디드라마 <미스터Q>에서 칼칼한 단발머리와 똑 부러지는 말투의 ‘악녀’가 되었을 때 모두가 놀랐다. 이후 드라마와 광고가 선호한 그의 이미지는 ‘세련되고 지적인 커리어 우먼’이었다(그맘때 한 설문조사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여배우’ 1위에 꼽히기도 했다). 영화로 건너와서도 송윤아는 참으로 보폭 큰 변신을 선보여왔다. 소시민의 꿈과 사랑을 따뜻하게 보듬은 영화 <불후의 명작>에서 그는 박중훈과 더불어 ‘생활인’이 되었다. 소주 광고 포스터의 송윤아를 보고 캐스팅했다는 심광진 감독은 “관상용 미인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감 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에 매료됐다고 했다. 그리고 <광복절특사>의 경순. 무식하고 경박하지만, 순수하고 솔직한 삼류 인생으로 분한 송윤아는 탈옥한 두 남자 못지않게 다이내믹한 좌충우돌을 선보였다.
올 여름엔 호러에까지 진출했다. 송윤아는 얼굴이 사라진 채 죽어간 이들의 사연을 추적해 들어가는 영화 <페이스>에 신현준과 함께 복안 전문가로 출연했는데, <페이스>의 유상곤 감독이 바라보는 송윤아는 또 다른 이미지다. “예전에 TV에서 구미호로 출연한 걸 본 적이 있는데, 느낌이 아주 좋았다. 이번 영화는 처음부터 윤아씨를 염두에 뒀고, 솔직히 ‘너무 딱이다’ 싶어서 걱정될 정도다.” 일부 언론에 ‘호러 마니아’로 포장이 되긴 했지만, 송윤아는 “여름이면 공포영화 한두편 보는 정도일 뿐”이라며 조금 민망해했다. 호러라는 ‘장르’ 때문에 작품을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것. “시나리오가 좋았어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 기대? 그런 거죠. 시나리오의 느낌대로 나와준다면 ‘죽이는 영화’가 되겠다 싶어서,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하기로 한 거예요.”
<페이스>를 하면서 힘들었던 건, 남들이 기대하는 그런 내용은 아니다. 물리적인, 육체적인 어려움도 거의 없었고, “기가 세기 때문인지” 다른 배우나 스탭들처럼 귀신에게 시달리는 일도 겪지 않았다. 다만 “내지르지 않는 연기”를 소화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고백. “속시원히 보여주지 못하는 역할이에요. 그래서 영화를 보시면, 송윤아 연기 별로다,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최민식 선배님도 그러셨는데, <올드보이> 같은 강한 연기가 오히려 쉽다구요. 저도 그랬거든요. <광복절특사>에서처럼 내지르는 연기가 하기도 쉽고, 반응도 더 좋아요. 많은 부분 절제하면서도, 적정한 선을 유지해야 하는, 이런 연기가 훨씬 어려운 것 같아요. 연기란 것이 하면 할수록 힘드네요.”
올해로 연기 10년차인 송윤아는 경력에 비해 출연한 영화 편수가 많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자신은 ‘영화배우’라는 타이틀을 달 자격이 없다고 했다.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서 누구나 영화배우로 불릴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그는 못박는다. 하지만 송윤아는 ‘사생활’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연기만 생각하고 달려왔음은 인정한다. “제가 일할 때는 독한 면이 있는데, 생활인으로서는 영 아니죠. 삶을 잘 즐기지 못하거든요. 촬영이 없는 날, 뭔가를 하고 싶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고, 어딜 가고 싶은데 그게 어딘지 모르겠고, 누굴 만나고 싶은데 그럴 누가 없는 거예요. ‘일이 없는 나’는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는 바보 같아요. 연기 시작하고 5년 동안은 쉬는 날이 없었어요. 계속 겹치기 출연을 해야 했고요. 일만 하다보니, 서른이 훌쩍 넘어버렸네요.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아요. 나이에 맞는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죠. 좀더 어릴 때 예쁘고 재밌게 못 살았다는 아쉬움, 그런 게 있어요.”
송윤아는 인터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영화 홍보를 뛰는 다른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한마디 한마디가 멋스럽고 심오해서” 감탄스럽지만, 막상 자신이 그렇게 입에 발린 이야기를 하노라면, 속에서부터 거부반응이 일어난다는 것. 그런데 “내 얼굴에 만족 못하는 것처럼, 내가 참여한 ‘내 영화’에 100% 만족할 순 없다”며 여백을 두는 그의 말이 오히려 미덥게 들린다. “최근 히트한 영화들이 거의 남자영화잖아요.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영화가 많이 안 만들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쉬는 여배우들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내가 원하고 관심이 있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먼저 다양한 작품들이 나와주는 게 우선이라고 봐요.” 우리는 송윤아를 10년째 지켜봐왔지만,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분명히 알게 된 한 가지는 송윤아가 영화 안에서도 밖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