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걸어다니는 ‘진보’ , 새로운 아시아의 뮤즈 장쯔이
2004-06-10
글 : 김도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어떤 축제라도 축제의 여신은 당연히 있는 법, 하다못해 작은 지방 도시에 사는 당신 집 담벼락에 붙여져 있는 그 무시무시한 ‘철쭉 (혹은 무엇이라도) 아가씨’ 포스터. 그 속에서 방긋 웃고 있는 옆집 셋째딸이라도 좋다. 그는 당당한 축제의 여신인 법이다. 올해 칸영화제의 여신은 여우주연상을 가져간 장만옥도, 사진기자들을 매혹시킨 샤를리즈 테론도 아니었다. 그건 두편의 영화 <연인>과 〈2046>을 양손에 자신만만하게 들고 찾아온 장쯔이였다.

칸에서 공개된 장이모의 두 번째 무협영화 <연인>은 사실 속이 반밖에 들어차지 않은 딤섬 같은 데가 있다. 하지만 영화는 때때로 환성을 내지르게 만들고, 가끔 너무도 아름다워서 스크린에서 장면들을 도려내고 싶은 욕망을 던져준다. 장쯔이는 그 아름다운 눈속임의 중심에 서 있다. 베이징 무용학원에서 6년간 전통무용을 배운 그녀의 애크러배틱한 몸짓이 와이어 액션의 기술과 만나는 순간, 인간의 가냘픈 몸이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마침내 수긍하게 된다.

더 큰 놀라움은 왕가위의 〈204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없는 날들을 기다리게 만든 뒤 하루를 더 연기하는 발칙한 이벤트를 벌인 뒤 마침내 공개된 왕가위의 신작에서, 장쯔이는 가슴 두근거리는 열연을 보여주었다. <버라이어티>의 데릭 엘리는 이 영화에서의 그를 ‘걸어다니는 진보’(Walking progress)(<씨네21> 445호 칸 현지 좌담 중)라고 일컬었고, 왕가위 영화의 자막을 담당한 토니 레인즈 역시 그의 연기가 칸 여우주연상을 받아 마땅한 훌륭한 연기라고 극찬(<씨네21> 452호 ‘〈2046>은 아직도 작업 중’)했다. 〈2046>보다 하루 늦게 상영된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린>에서 의문의 여지없이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준 장만옥이 아니었다면 장쯔이가 여우주연상을 가져가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화된 것이었다. 심지어 한 홍콩기자는 심사위원 기자간담회에서 ‘왜 장쯔이가 여우주연상을 받지 못했나?’라고 항의성 질문을 던져 타란티노로 하여금 장만옥의 연기에 대한 칭송을 늘어놓으며 방어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모든 주인공들이 그저 망령처럼 부유하는 〈2046>의 호텔에서 장쯔이만이 그처럼 생생한 현재성을 띠는 것은 놀랍다. 가지고 놀고 싶었던 남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그 한없는 자존심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겨가며 사랑을 갈구하는 이 고급창녀 역할 ‘바이 링’의 쓸쓸함. 그리고 그 쓸쓸함마저 독한 위스키처럼 찌릿하게 관객에게 던져놓는 장쯔이는 공리, 유가령, 왕비 등 영화 속 다른 여배우들의 압도적인 이미지들에 그늘을 드리운다. 많은 사람들이 〈2046>에서의 그의 연기를 본 뒤 “왕가위가 대체 어떻게 배우들을 단련시키는지 궁금하다”라고 했지만, 우리 시대의 뛰어난 감독이 얼마나 잔인하게 배우들을 부리고 달래고 기다리게 만들고 때로는 실망시키는지(1년간 작업했던 모든 장면이 잘려나간 〈2046>의 장만옥은 어떤가) 우리는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기자회견장의 양조위는 “<화양연화>를 찍으면서는 수없이 장만옥의 손을 잡아주며 달래야 했지만, 장쯔이에게는 감독보다 내가 더 혹독했던 것 같다(웃음)”라며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이 농담의 아래에 스멀스멀 숨어서 드러나는 25살 여배우의 독종 같은 열정 역시 그냥 지나쳐 갈 수 없다.

장쯔이는 <연인>에서의 시각장애인 연기를 위해 실제로 시각장애인 여인과 두달간 동거를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그녀는 정말로 긍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이 배웠다”라고 했다. 그런 뒤 곧바로 “사실, 다 보이면서 안 보이는 척 연기하는 게 제일 힘들었지”라며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기자들을 즐겁게 희롱한다. 칸에서 그녀가 새롭게 밝힌 차기작은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라쿤 팰리스>라는 뮤지컬영화. 게다가 그는 애덤 샌들러의 차기작 <굿 쿡, 라이크스 뮤직>(Good Cook, Likes Music)에서 소포로 배달되어온 아가씨 역할을 맡는다. 스즈키 세이준과 애덤 샌들러라니. 그는 진정으로 기대했던 이상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영역으로 돌진하고 있는 새로운 아시아의 뮤즈다. 게다가 3일 만에 사랑에 빠진 남자를 위해 3년을 기다려온 남자를 버리는 <연인>의 ‘메이’처럼, 장쯔이는 당신의 기대를 언제나 즐겁게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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