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여친소> 투자 및 해외배급한 빌 콩 인터뷰
2004-06-10
글 : 박은영
“인류 보편적 공감대, 그 가능성을 봤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는 제작 발표 당시부터 화제를 몰고 다닌 영화다. <엽기적인 그녀>의 곽재용 감독과 전지현이 다시금 의기투합한 프로젝트라는 것도 귀를 번쩍 뜨이게 했지만, 그보다 의미심장한 대목은 <와호장룡> <영웅>의 프로듀서 빌 콩이 제작비 전액 투자(순제작비 40억원과 마케팅비 20억원)와 해외 배급을 책임지기로 했다는 사실이었다. <여친소>가 본격 ‘아시아 프로젝트’ 1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빌 콩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빌 콩은 <여친소>의 어떤 가능성에 베팅을 결심한 것인지, 한국영화의 오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 아시아영화의 미래를 어떻게 내다보고 있는지, 청해 듣고 싶어지는 것이다. 지난 2월, 홍콩에 들른 <씨네21> 취재진이 어렵사리 그를 만나 인터뷰를 청했을 때 그는 <여친소>에 대한 언급만은 한사코 거부했었다. 아직 때가 안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 5월28일, 빌 콩의 멀티플렉스 팰리스극장에서 성대하게 열린 <여친소>의 홍콩 프리미어를 계기로 다시 만난 그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여전히 신중하고 겸손한 모습이었다. 프리미어를 마치고 나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시각에 한국 기자단에게 야참과 맥주를 권했던 빌 콩은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피로와 흥분이 교차된 얼굴로 인터뷰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흥분돼서 잠을 못 잤다”는 건 과장이 아닌 듯 보였다. <와호장룡> <영웅>을 통해 30억 중국 시장을 열어젖히고, 서구에 아시아영화의 힘을 입증해보인, 아시아 영화계 최고 실력자의 다음 ‘목표’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지만 ‘당신은 야심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빌 콩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자신은 그저 영화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의 하나일 뿐이라고, 그는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나중에 이를 전해 들은 곽재용 감독이 “빌 콩은 야심만만하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을 수정했는데, 그게 바로 정답인 것 같았다.

영화 어떻게 봤나.

울었다. (웃음) 관객 반응 체크하러 일부러 다른 상영관에서 봤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시작부터 관객이 확 몰입하는 것 같았고, 영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게 보였다. 영화 끝나고 보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운 흔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슬프거나 어두운 느낌이 아니었다. 아마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엔딩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전지현에게 먼저 러브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 궁금하다.

처음 전지현을 본 것이 <엽기적인 그녀>를 통해서다. 그때 이미 참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홍보차 홍콩을 찾은 그녀를 직접 만나보니 영화에서 보여준 것 이상의 가능성과 매력이 있었고, 꼭 한번 같이 영화를 해보고 싶어졌다. 정훈탁 대표가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가 무척 많은 사람인데, 그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곽재용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보내왔고, 그렇게 영화화하게 된 거다. 어떤 배우를 좋아해서 기용하는 것만으로는 영화가 안 된다. 그건 배우에게도, 제작자에게도 손해다. 가장 중요한 결정 근거는 시나리오여야 한다. 마침 <여친소>는 시나리오가 감동적이었던데다가 전지현을 모델로 쓴 캐릭터 경진도 매력적이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홍콩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기획한 것은 어떤 효과를 기대해서인가.

아시아 무대를 겨냥한 영화로 소개하기에 홍콩은 적절한 곳이다. 한국에서 첫선을 보인다면 단순히 한국영화처럼 보일 것이고, 중국에서 행사를 하기엔 기술적인 문제가 뒷받침되지 않았다. 홍콩은 작지만, 중국을 커버하는 것은 물론, 싱가포르와 대만 등의 동남아 시장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또한 불법 복제판이 통제되는 곳도 홍콩이다. 동시 개봉을 위해 홍콩을 포함한 중국 남부 지역에 들인 마케팅 비용만 수백만달러에 이르고, 지난 2년 동안 꾸준히 신경을 써왔다(<여친소>는 홍콩 전체 58개 극장 중 30개 극장에서 상영되는데, 이 개봉 규모는 <슈렉2>보다도 큰 것이다. 또 중국에서는 상영관 수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100벌의 프린트를 보낸 바 있다. 이 밖에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타이, 싱가포르 등지에서는 여름 시즌에, 일본에서는 대목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다).

중화권 개봉 제목 <야만사저>(野蠻師姐)가 <엽기적인 그녀>의 개봉 제목 <아적야만여우>(我的野蠻女友)를 연상시키는데다 코미디로만 포장된 감이 있다.

홍콩에서 개봉하는 외화들은 대개 영어 제목을 쓰거나 새로운 제목을 붙인다. <엽기적인 그녀>의 경우도 〈My Sassy Girl>이라는 영어 제목을 응용해 붙인 것이다. 경진의 캐릭터가 경찰이고, 또 괄괄한 성격이기 때문에 지금의 개봉 제목을 붙이게 된 것이다. 영화의 내용에서 연상한 것이지, 속편이라는 암시를 주려 한 것은 아니다. <엽기적인 그녀>와 같은 점이 있다면, 감독과 배우가 같고, ‘인연’을 다룬 영화라는 점 정도라고 생각한다. 홍콩 관객은 제목으로 영화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삶 자체가 팍팍하기 때문에 무겁고 슬픈 영화는 즐겨보지 않는다. <여친소>의 경우도 슬픈 영화이긴 하지만, 슬프다고 미리 알려주기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극장에 오길 유도했다. 코미디를 기대하고 오더라도 실망할 일은 없을 거다. 100% 코미디는 아니지만, 캐릭터가 상당히 코믹하기 때문이다.

감독들에게 특정 문화 틀에 얽매이지 않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 작품을 주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친소>의 경우 그런 주문이 어떻게 반영됐다고 보면 될까.

시나리오를 보거나 촬영분을 보고 이런저런 제시는 하곤 한다. 영화를 보고 기자들이 싫어한 부분이 있다면, 아마 그게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반영한 대목일 거다. (웃음) 영화 내적으로 특별히 관여하진 않았다. 그럴 이유가 별로 없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잘 드러나고 잘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는데, 외국인으로서 내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공감하고 또 감동했기 때문에 특별히 주문할 내용은 없었다.

완성보증보험을 적용한 첫 사례다. 한국 영화계에도 이를 일반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영화 제작의 활성화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제도라고 생각하나.

완성보증보험은 제작자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한국은 현재 투자자나 투자사들이 적극적으로 제작비를 대고 있고, 그래서 영화 제작이 활발한 편이다. 어느 날 그들 모두 영화 제작에서 발을 뺀다고 가정해보자. 더이상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 완성보증보험의 경우는 보험회사에 작품 기획서를 내야 하는 것은 물론, 날마다 촬영 내용과 제작비 지출 내역을 보고해야 한다. 보험회사에서 만족할 만큼 믿음을 주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 더불어 제작 과정도 한결 투명해지고 또 안전해진다. 이런 제도가 구축되면, 제작비를 구할 수 있는 통로가 하나 더 열리는 셈이다.

전액 투자와 배급 책임의 리스크를 감수했다는 것은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 때문일 텐데.

정정부터 하자. 리스크 부분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안 되면 어쩌나,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영화하면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시나리오 보고 투자를 결정하면, 그 이후엔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영화가 잘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돕는, 내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한국영화는 지금도 성공적이지만,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시점이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영화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영화에 대한 투자는 나 아닌 누구라도 했을 것이다. 내가 먼저 시작했고,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다.

해외 투자가 이어질 거라는 전망은 어떻게 하게 됐나. 한국영화의 어떤 점을 높이 사는 것인가.

한국영화는 무엇보다 스토리가 창의적이다. <올드보이>를 예로 들어보자. 일본 만화가 원작이지만, 전혀 다른 영화가 되지 않았나. 한국에선 어떤 감독이나 작가가 성공을 거두면 그것을 추월하려는 노력들이 있는 것 같다. 홍콩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선 특정 작품이 성공을 거두면, 비슷한 아류작들이 쏟아져나온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한국 영화인들의 창의성, 바로 그 점이 부러운 거다(최근 그는 <올드보이>를 수입해, 홍콩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5월 28일 홍콩에서 열린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프리미어 행사에서 앞서 전지현, 정훈탁 대표, 빌 콩(사진 왼쪽부터)이 자축의 시간을 가졌다.

범아시아적으로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은, 같이 일해보고 싶은 한국의 감독과 배우가 또 있다면.

너무 많다. 이름을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다. 요즘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그만큼 가능성도 많아졌다. 내가 한국영화가 아시아적 공감대를 의식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일 뿐이다. 모든 한국영화가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지 않나. 그렇지만 요즘엔 한국 안팎에서 대성할 배우들이 눈에 많이 띄는 건 사실이다. 그렇게 좋은 배우들이 많고, 좋은 시나리오가 많다면, 앞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중화권 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든 듯하다. 중화권 영화의 현재를 진단해본다면.

어려움에 봉착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좋은 영화들은 계속 나온다. 풍소강의 <휴대폰>, 장이모의 <영웅>, 그리고 허핑의 <천지영웅> 등등. 그런데 문제는 중국인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고, 해적판을 즐겨본다는 점이다. 관객이 돈을 쓰지 않으니까, 제작자도 돈을 못 벌고, 그러다보니 저예산영화를 만들게 되는데, 관객은 또 그런 영화들을 외면한다. 그런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이런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다. 관객이 자국영화를 사랑해주는 것이다.

상업영화 시장으로서 중국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보나.

<영웅>은 중국 내에서 3천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보고된 수익 내용만 그러니 보고 안 된 수익을 보태면 엄청날 거다. 그런 만큼 앞으로 5년에서 8년 사이에 1편의 상업영화가 중국에서 벌어들일 수 있는 박스오피스 수익은 1억달러에 이를 거라고 본다. 지금 중국에는 좋은 시설의 극장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도 점차 부유해지고 있다. 더이상 남의 것을 훔쳐보지 않아도 (해적판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시점이 오는 것이다. 중국 정부도 이제까지는 이 문제를 방관해왔지만, 외부에 체면이 안 서기 때문에 조만간 관여하게 될 것이다.

중국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걸 비법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작가와 감독을 격려하는 길밖엔 없다.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지금 전세계 영화인들의 목표는 중국 시장일 것이다. 지금 이 상태로 매진한다면, 진출 가능성 일순위는 한국영화다. 이건 과장도 거짓말도 아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열성인 한국영화의 합작이나 수출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당신의 궁극적인 목표, 야심은 무엇인가.

나는 야심가가 아니다. 나는 그저 영화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영화를 배급하고 투자하고, 극장을 운영하는 것이다. 홍콩과 중국 사람들이 평소 접하지 못했던 좋은 해외영화들을 많이 소개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나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영화인이다. 나도 우리 직원들도 모두가 영화의 노예들이다. (웃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