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별난 게임들로 가득한 지적 유희, <차례로 익사시키기>
2004-06-15
글 : 정승훈 (영화평론가)
피터 그리너웨이식 기호의 제국에서 펼쳐지는 세 여자의 남편 살해 프로젝트

‘씨씨 콜핏’이라는 똑같은 이름의 모녀 삼대가 있다. 노년의 씨씨1은 술 취한 바람둥이 남편을 욕조에 익사시킨다. 중년의 씨씨2는 도통 무심한 뚱보 남편을 바다에 익사시킨다. 갓 결혼한 씨씨3는 수영도 못하는 새신랑을 수영장에 익사시킨다. 그때마다 불려온 검시관 매짓은 연쇄살해극을 단순사고사로 위장해준다. 하지만 그 대가로 모종의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매짓을 그녀들은 매번 퇴짜 맞힐 뿐이다. 이 기묘한 죽음의 퍼레이드와 욕망의 숨바꼭질이 영국산이라면, 히치콕 같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영화적 후예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줄넘기소녀의 별 이름 100개 외우기로 시작한 영화가 화면과 대사 곳곳에 1에서 100까지의 숫자를 숨은그림처럼 뿌려놓는다면? 실로 영화는 스릴러적 몰입을 방해하는 별난 게임들로 가득하다. 매짓의 아들 스멋은 제멋대로 창안한 꽤 지적이면서도 허망한 구석이 있는 게임들을 차례차례 선보인다. 피터 그리너웨이 체질이 아니라면 이마저 얼떨떨하겠지만, <차례로 익사시키기>는 <필로우 북>이나 〈8과 1/2 우먼>처럼 관객을 차례로 졸음 속에 익사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재밌는 축에 속하는 이 영화는 히트작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와 더불어 90년대 이전 그리너웨이의 지적 유희를 맛보기에 손색이 없다.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숫자 키워드는 여기서 3과 100이다. 3의 배수를 읊는 3명의 아내는 영화를 3등분하며 3명의 남편을 수장한다. 이 씨줄 위에, 씨씨-남편, 매짓-씨씨, 스멋-줄넘기소녀의 관계가 세겹의 날줄로 짜여든다. 여기에 미니멀한 바로크풍 관현악이 대략 3개의 라이트 모티브를 교대로 반복한다. 이같은 세개의 계열들을 선형적으로 배치하는 이정표처럼 1∼100의 숫자들이 차례로 튀어나온다. 또한 별 이름 외기나 나뭇잎 색칠하기에 암시되듯, 100은 무수히 많은 것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것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명명하는 기호들을 대표한다. 이런 숫자놀음은 그리너웨이 특유의 대칭구조로 통합되는데, 기하학적 미장센이나 닮은꼴 형제들뿐 아니라 게임구조 자체가 그렇다. 모든 게임들은 남/여, 승/패, 삶/죽음을 변주하며, 삼위일체를 이루는 세 여인은 이원구조의 한 항으로 수렴된다. 작은 게임들로 미분되고 큰 게임으로 적분되는 구조는 결국 인생이 게임이고 세상은 그 무대라는 그리너웨이 철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편 인생이 게임이기에 게임은 늘 욕망의 좌절과 구조의 붕괴에 직면하기도 한다. ‘송장되기 게임’을 가능케 하는 곤봉의 순환은 게이머들을 송장으로 만들면서 종결되게 마련. 구조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내부의 운동으로 인해 스스로 해체되는 거다. “매일 위대한 것들이 장렬히 죽어가는” 기호의 제국에선 100까지의 넘버링이 그래서 죽음의 카운트다운과 같다. 전작인 <하나의 Z와 두개의 O>에서 집요하게 추궁된 죽음과 부패의 문제는 여기서도 온갖 동식물과 벌레들의 클로즈업 속에 어른거린다. 검시관 부자는 이 편재하는 필사(必死)의 존재들, 그 시체들과 더불어 게임하는 시체애호가들이다. 시체와 몸을 섞었고 시체를 조작하는 매짓, 시체를 옐로/레드로 분류해서 추모하는 스멋은 모두 삶이라는 게임에 내장된 죽음의 기운을 엿보게 한다.

흥미롭게도 영화 속의 남자(“이기적 행동으로 불행을 몰고오는 자”)는 모두 죽는데, 그리너웨이의 페미니즘은 무책임한 가부장을 차례로 익사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최종적인 과녁은 바로 검시관 부자이기 때문. 그러니까 세상을 체계화해서 장악하려는 자는 결국 남성이며, 남성적인 폐쇄 구조는 스멋의 자살처럼 죽음본능(타나토스)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인지 모른다. 발기불능에 민감한 매짓과 남자가 되고자 할례하는 스멋은 남성의 이 불모성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욕망은 미끄러지고 고꾸라질 뿐 충족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불가능한 미래다. 여자는 삼손을 거세시키는 데릴라처럼 가위를 휘두르며(할례도 일종의 거세다), 사이렌처럼 물 한복판으로 남자를 유혹한 뒤 좌초시킨다. 분류나 분할이 불가능한 물은 구조적 체계를 와해시키는 타나토스의 이미지다. 그러나 수영할 줄 알고 임신할 수 있는 여자에게 물은 에로스의 양수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 장미꽃 만발한 밤의 수면은 그처럼 남성적 체제를 빠져나가며 익사시키는 여성의 위험한 매력으로 반짝인다. “능력있는 여자는 딸을 낳는다”니, 생을 거듭하는 건 씨씨라는 이름의 여성인 셈.

그렇다고 그리너웨이가 페미니스트인 건 아니며 철학없인 영화를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중세 이래 서구 예술을 백과사전처럼 섭렵해서 전시하는 그의 많은 영화들처럼, <차례로 익사시키기> 역시 화려하고 풍성한 스타일만으로도 포만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더없이 정교한 회화적 프레임과 (최근 내한공연한) 마이클 니먼의 전위적 클래식도 여전히 품격있는 볼거리, 들을거리들이다. 관객에 따라서는 꽤 낯설고 새로운 이미지와 사운드로 눈과 귀가 출렁댈지 모른다. 물론 이 미지의 기호들은 속시원히 답을 가르쳐주진 않는다.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현학취에 거부반응을 보이지만 않는다면, <차례로 익사시키기>는 익사의 위험을 유쾌하게 피해가면서 머리를 써봄직한 ‘예술영화’로 다가올 것이다.

:: 숫자와 문자가 지배하는 영화들

피터 그리너웨이의 기호학적 세계

고다르는 매체의 물질성에 주목하고 거리두기를 가능케 하는 브레히트적 장치로 종종 숫자와 문자를 활용했다. 고다르와 프랑스 구조주의의 직접적 수혜자인 그리너웨이는 제목부터 언어 자체를 지시하는 메타언어인 경우가 많다. 2001년 회고전에서 소개된 〈H는 House의 첫 글자>〈H를 통과한 산책> 등의 초기 단편은 인간을 지배하는 기호에 대한 관심의 출발이었다. 그 뒤 알파벳과 숫자는 종종 그리너웨이 영화의 구조적 축이 된다. 출세작 <몰락>은 근미래의 신종 전염병에 걸린 92명의 환자를 보여주는데, 2003년 부산영화제 상영작 <털스 루퍼의 여행가방>도 92개의 가방을 찾아다닌다(92는 우라늄 원자번호라고도 함). 국내 출시된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은 12개의 그림을 그려가다 13번째에서 죽음과 마주치며, 동물원(zoo)을 뜻하는 <하나의 Z와 두 개의 O>는 1명의 여인과 2명의 쌍둥이를 26개의 알파벳과 겹쳐놓는다. <건축사의 배>에서 9달의 전시회 준비는 아내의 임신기간과 겹치며, <요리사…>는 7일간 7가지 색깔을 10개의 코스에 펼쳐놓는다. 펠리니의 〈8과 1/2>을 끌어쓴 〈8과 1/2 여인>은 반신불수 포함, 그 수만큼의 여자들을 채집한다.

초기 그리너웨이의 정태적인 구조주의가 기호를 통한 세계의 체계적 파악을 실험했다면, 이후 성과 죽음이 본격화된 영화들은 그 세계가 인류학과 진화론적으로 부패하고 변전하는 (다소 탈구조주의적인) 과정에 주목한다. 그러나 영화학에서도 기호학이 쇠퇴해간 80년대를 넘어서자 그리너웨이의 실험은 디지털 매체로 옮겨간다. 90년 전후의 〈TV 단테><프로스페로의 서재>는 HDTV를 활용한 이중인화나 흑백-컬러 결합 등을 시도했고, <필로우 북>에서 만개한 화면분할과 중첩은 <털스 루퍼…>에서 수많은 윈도의 생성으로 진화한다. 이런 변화는 아날로그 기호학의 단선적인 시간을 복수의 시간들로 증식시키면서 영화적 시공간 자체를 빅뱅시켰다. 이 분열증 걸린 스크린은 그리너웨이가 흠모하는 보르헤스의 끝없이 갈라지는 길과 우주적인 도서관을 점점 더 닮아가고있다. <털스 루퍼…> 시리즈는 지금도 제작 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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