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신화연구자가 분석하는 영화 <트로이>와 원작 <일리아드>
2004-06-16
글 : 장영란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연구교수)

신화연구자가 분석하는 원작, 영화, 그리고 역사적 사실

영화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원작으로 한 대서사시를 스펙터클하게 담아내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전쟁에 대해 알고 있지만, 정작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일단 번역은 되어 있지만 그리스어인 데다가 낯선 서사시 형태가 의욕을 감소시키며, 초반에 장황한 전투장면과 각 도시의 지도자와 함선 목록이 나오는 부분에 이르면 아예 포기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가 서구 문학사를 장식하는 최초의 문헌이며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고전 중의 고전이기 때문에 한번은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번에 <일리아드>를 영화화한 <트로이>는 상당한 기대를 불러일으킬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선 영화로서는 짧지 않지만 엄청난 분량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준다. 더욱이 우리가 익히 들어본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들이 총출동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제작 규모와 물량 및 첨단 기술 등 볼거리들이 포진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트로이>는 역시 ‘우리’를 별로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편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스펙터클한 전쟁드라마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읽은 사람들에게는 원래 예상했던 대로 원작과 너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1. 의상과 문양

영화 <트로이>는 기존에 나온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영화에 비해 비교적 역사적 고증을 따르려 노력을 했지만 역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트로이와 미케네 및 크레타 등의 고대 문명이 발굴되면서 그리스 문화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그래서 트로이 성의 위치나 내부 구조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당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과 관련해 의복이나 장식물 및 내부 장식 등과 같은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묘사하기 쉽지 않다. 기원전 1250년을 전후로 추정되는 생활상과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트로이>에서 역사적 배경을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를 썼던 기원전 7∼5세기 아르카이크 시기에 맞추어 그리스 유물과 도기 그림을 기초로 전투복이나 방패 및 장식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트로이>에 나오는 영웅들의 무구들은 세부적으로 아르카이크 시기의 도기 그림에 나오는 청동 투구나 물푸레나무 창 및 방패와 매우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방패(디필론 형태, 둥근 형태)와 의복 특히 그리스편의 아킬레스가 때로는 등에 메고 질주하는 방패는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그리스의 두 종류의 방패 중 하나인 디필론과 유사하다. 그것은 둥근 형태에 양옆이 잘록하게 들어가 있는 방패이다. 이것은 둥근 형태의 방패보다 더 오래된 형태이다. 그러나 <트로이>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트로이 성에서 그리스군과 격돌하는 트로이군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프리아모스와 헬레네 옆쪽으로 늘어서 있는 트로이의 왕녀들이 머리를 뒤덮는 엄청난 귀금속을 치렁치렁 달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슐리만이 발굴한 기념으로 아내 소피가 장식하고 찍은 사진 때문에 유명해진 ‘헬레네의 보석’이라 불리던 것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이 보석은 나중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프리아모스의 트로이 보물이 아니라 훨씬 이전인 기원전 약 2000년경의 보물로 밝혀졌다.

<트로이>가 펼쳐낸 상상력은 두 군대의 깃발에 나타난 문양에서 두드러진다. <일리아드>에는 양군을 구별해주는 문양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영화에는 트로이군은 말을 문양으로 삼았고, 그리스군은 황소를 문양으로 삼고 있다. 각 군대의 문양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표현했다. 트로이 왕가에는 제우스가 트로이 왕자 가니메데를 납치한 보상으로 라오메돈에게 준 말에 관한 신화가 있다. 호메로스가 트로이인들을 ‘말사육자’ 혹은 ‘질좋은 망아지’라 불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말’이라는 상징은 탁월한 선택이다. 또한 그리스 군대의 문양으로는 황소의 얼굴을 형상화했는데 이것도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호메로스는 그리스군을 아르고스인이라 부르는데 아르고스를 가장 사랑하는 여신 헤라는 ‘암소눈을 가진 여왕’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2. 눈 문양이 그려진 그리스 함선

△ 그리스 함선. 배 고물에 '눈' 모양이 동그랗게 그려져 있다(맨 위). 영화 <트로이>에서 고증한 그리스함선(위).

나아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는 그리스 함대가 바다를 수놓은 장면은 장관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리스 함선의 수는 얼마나 될까? <일리아드> 2권에서 호메로스는 세밀하게 함선과 장수 수를 열거하고 있는데, 약 177개의 도시에서 44명의 지도자들이 약 10만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1186개의 함선을 타고 오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영화 속에 나오는 배의 형태는 비록 기원전 13세기는 아니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 그려진 도기 그림과 비슷하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히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도기 그림에서 배는 보기 어렵다. 아티카에서 출토된 <오디세우스와 세이렌들>이라 불리는 도기 그림에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묶여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오디세우스가 타고 있는 배의 형태가 영화 <트로이>의 배의 형태와 비슷해 보인다. 배 안에 사람들이 앉아서 배에 달린 노를 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특이하게 배 고물에 ‘눈’(目) 모양이 동그랗게 그려져 있다. 영화에서는 고물쪽에 눈 모양을 길쭉하게 그려넣었다.

3. 헬레네의 실제 나이는 중년?

이제 영화 <트로이>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트로이 전쟁의 역사적 시기와 관련하여 영화 첫 화면에 지금부터 약 3200년 전, 즉 기원전 약 1200년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그때는 트로이를 공격하기 위해 ‘그리스여 궐기하라’고 외치던 미케네 왕국은 이미 멸망한 뒤이다. 따라서 그리스 총사령관이던 아가멤논이니 헬레네는 이미 다 죽고 없던 때이다. 일반적으로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약 1250년경에 일어났다고 추정한다. 그리스는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돌아온 뒤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얼마 되지 않아 약 1200년경에 멸망한다. 궁극적으로 전쟁에는 승리자란 없다. 모든 사람이 패배자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1200년부터 750년까지의 기간을 문자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그리스의 암흑기’라 말한다. 따라서 영화의 화면은 최소한 약 3250년경라는 표기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트로이>에는 헬레네가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돌아온 직후 그리스에서는 미케네의 아가멤논을 중심으로 동맹군이 형성되어 트로이를 공략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신화 속에서는 그리스가 헬레네를 되찾으러 트로이로 가는 데 상당히 오랜 세월이 소요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스 동맹군이 최초로 소집된 것은 헬레네가 납치되고 나서 2년이 지난 뒤였다. 그렇지만 이 첫 번째 트로이 원정은 실패로 끝난다. 그리스군은 트로이가 아닌 더 아래쪽에 있는 미시아에 상륙하여 그곳이 트로이인 줄 알고 싸웠다. 그 뒤 다시 그리스로 돌아와 트로이로 출격하기 위해 재집결하는 데 무려 8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헬레네가 트로이로 간 지 10년이 지난 뒤에야 그리스 동맹군은 제대로 출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영웅이나 여인들은 중년을 넘긴 나이가 된다. 트로이 전쟁 자체가 약 10년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헬레네의 나이를 가늠해보면 다음과 같다. 헬레네가 16살 정도에 결혼했다고 하면 파리스를 따라 스파르타로 떠날 때 9살 난 딸 헤르미오네가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약 25살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헬레네가 트로이로 간 뒤 10년이 지나서야 그리스군이 트로이에 도착하였고 다시 약 10년간 전쟁이 지속된 것을 감안한다면 트로이 전쟁 말엽에 헬레네의 나이는 최소한 45∼50살이 된다. 영화 속에서 헬레네가 20살 초반의 나이로 등장하는 것은 헬레네라는 인물이 가진 가장 큰 상징적 의미 때문에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다.

4. 아킬레스에 대한 잘못된 묘사들

영화 <트로이>의 가장 큰 주제는 전쟁과 사랑이다. 트로이 전쟁은 사랑으로 시작하여 전쟁으로 끝났다. 그리하여 영화는 스파르타의 헬레네가 파리스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헬레네는 메넬라오스의 눈을 피해 파리스와 사랑을 나누고 운명적인 사랑을 따라 트로이를 떠난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는 형 헥토르와 함께 스파르타에 왔다가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스파르타까지 파리스 왕자와 동행했던 인물은 헥토르 왕자가 아닌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아이네이아스이다. <트로이>에서는 마지막에 트로이가 함락될 때 파리스로부터 트로이 왕의 보검을 건네받는 인물로 아이네이아스가 잠깐 등장한다. 로마의 호메로스라 불리는 베르길리우스에 의하면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가 함락한 뒤 유민들을 이끌고 떠돌다가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로마 건국의 기원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의 최고 영웅은 역시 아킬레스이다. <일리아드>는 아킬레스의 분노로 시작하여 슬픔으로 끝난다. 그리스군의 운명은 아킬레스라는 한 영웅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아킬레스가 없는 그리스군은 점차 트로이군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영화 <트로이>도 아킬레스의 공격으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영화는 아킬레스의 인간적인 면모를 파리스와 같이 치기어린 ‘사랑’에서 찾기 때문에 전체적인 서사 구조를 무너져버리고 만다. 아킬레스는 그리스군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이지만 한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걸로 나온다.

영화에서 아킬레스는 트로이 해안에 뛰어내린 뒤 바다를 내려다보는 아폴론 신전을 침략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 속의 허구이다. 원래 아폴론 신전은 트로이 성밖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브리세이스를 아킬레스와 만나게 하기 위한 극적 장치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트로이 성의 구조를 보면 아폴론 신전은 프리아모스의 ‘페르가모스’라고 불리는 성채 안에 있었다고 한다. <일리아드>에서는 아폴론이 여기서 트로이 전쟁을 관전하는 모습을 자주 그리고 있다. 따라서 영화에서처럼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폴론 신전이 바다를 향해 서 있을 리가 없다. 포세이돈 신전이라면 모르지만 말이다.

△ 영화 <트로이> 중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결투장면

<트로이>는 신들이 완전히 사라진 인간들의 드라마이다. 영화 속의 아킬레스는 마치 신들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 같은 행동을 보여준다. 그는 아폴론의 황금 신상의 목을 뎅겅 잘라내며 신성모독을 범한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일리아드>의 아킬레스의 본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아킬레스는 신들의 사랑을 받는 인물로 신들의 충고를 사려 깊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온다. <일리아드>의 유명한 첫 장면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의 싸움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킬레스는 아가멤논의 비열한 행동에 분노하여 칼을 빼들려다가 아테네 여신의 충고를 받아들여 참고 막사로 돌아간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대부분의 주요 영웅들은 때로는 신들의 의지에 반하는 듯한 행동을 하지만 곧바로 순종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전체는 오히려 신과 인간이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보여주며, <일리아드>도 신들에게 도전하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여러 차례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영화들이 ‘헬렌’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영화 <트로이>는 아킬레스라는 그리스 최고의 영웅을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도 아킬레스의 죽음으로 끝낸다. 아킬레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일까? 영화에서는 브리세이스를 구하려다 죽은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녀는 트로이 왕가의 처녀로 헥토르의 사촌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브리세이스는 트로이 왕족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도 아니며 처녀도 아니다. 그녀는 트로이가 아닌 미시아의 아폴론 사제인 브리세우스의 딸로 아킬레스가 리르네소스를 약탈할 때 미네스라는 남편을 살해하고 데려온 여인이다.

5.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보다 연상이었다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스의 비극적 운명은 브리세이스가 아니라 바로 파트로클로스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의 사촌동생으로 아직 어리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 파트로클로스는 원래 아킬레스보다 나이가 더 많은 인물로 사촌은 아니지만 가까운 친척관계에 있다. 파트로클로스의 할머니 아이기나는 아킬레스의 증조할머니이다. 보통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친구관계로 설정되지만 가족 관계로 따지만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와 같은 서열에 있다. 그렇지만 <일리아드>에 따르면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보다는 연장자가 분명하므로 영화에서처럼 파트로클로스를 어린 동생으로 취급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아마도 영화에서는 아킬레스의 분노를 극단으로 치닫게 하여 다시 전장터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파트로클로스를 어리게 설정하여 동정과 연민을 유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동성애적인 측면을 배제한 상태에서 선택한 방법이다.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너무나 사랑하여 자다가 환영을 보고 가슴에 끌어안으려 했으며, 파리스에게 죽을 때 파트로클로스와 합장할 것을 유언하였다.

아킬레스의 비극적 운명은 헥토르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스는 헥토르가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죽었으며 트로이 성 안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더욱이 트로이 목마를 만들 때에는 이미 그가 죽은 지 한참이 지난 뒤였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아킬레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가 아버지를 대신해 참전하는 것으로 나온다. 트로이 목마 속에는 아킬레스가 아닌 아들 네오프톨레모스가 오디세우스와 함께 숨어 있었다. 그러나 <트로이>에서는 난데없이 트로이 목마 속에서 아킬레스가 뛰쳐나온다. 그는 브리세이스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나섰다가 파리스의 화살에 발뒤꿈치를 맞아 죽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트로이>는 위대한 영웅서사시가 아닌 멜로드라마로 전락한다.

마지막으로 파트로클로스나 아킬레스의 장례의식에서 눈 위에 동전을 두개 올려놓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저승노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흔히 그리스에서 죽은 이후에 영혼이 아케론 강을 건널 때 뱃사공인 카론에게 줄 삯이라 생각하여 놓은 것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사회에서는 영화와 달리 대개 눈이 아닌 입에 놓았으며, 초기에는 1오볼로스를 놓고 나중에 2오볼로스를 놓는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트로이 전쟁이 기원전 1250년경에 일어났다고 한다면, 이때에는 그리스에 아직 동전이 만들어지지 않은 때이다. 대체로 기원전 약 7∼6세기에 리디아에서 최초로 동전이 주조되었다. 그러므로 파트로클로스나 아킬레스의 장례식이 일어난 시기인 기원전 13∼12세기에는 당연히 죽은 자의 시신에 올려놓는 동전은 없었던 것이다.

<트로이>는 <일리아드>를 영화화한 몇 안 되는 작품들 중 하나이다. 그것은 전체적인 배경이나 주제 집약도에서는 기존의 트로이 전쟁에 대한 영화보다는 훨씬 근접도가 높다. 그렇지만 영화로 이미지화되면서 상당 부분의 서사적 내용을 불필요하게 변형하면서 원작의 기본적인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예술적으로도 탁월한 평가를 받지도 못하게 되었다. 도대체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영화로서의 독창적인 작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결정적으로 원작의 기본 정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사정없이 난도질을 해 만들어낸 서사가 대중에게 호응은 물론이고 예술성도 평가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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