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솎아내고 근대인의 포즈를 투입한 <트로이>
트로이 전쟁은 신화적 에픽(대서사시)이자, 유적을 통해 확인되는 역사이다. 영화 <트로이>에는 신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 트로이 전쟁을 그리고 있는 걸까? 이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다룬 것이라면, 심대한 역사관(전쟁관)의 왜곡이 있다.
신화에 의하면, 절세미인이었던 헬레네에겐 청혼자가 많았다. 그들간에 분쟁이 계속될 것을 우려한 장인은 청혼자들에게 서약을 받는다. 누구를 선택하든지 간에 결과에 승복하며, 누구든 그들의 결혼생활을 깨는 자는 청혼자들 모두가 응징하겠다는 동맹결의이다. 메넬라오스가 선택되고 동맹은 유지된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생활이 트로이에서 온 파리스에 의해 깨진다. 동맹자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트로이로 쳐들어간다. 파리스는 왜 전쟁까지 불사하며 그리스 동맹의 핵(무기)인 헬레나를 전유했을까? 신화에 의하면 그것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계략으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벌인 일이다. 재미있지 않나? 신화에서 헬레네를 둘러싼 청혼자 동맹은 ‘합리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상쟁을 피하고자 담합한다(실제로 고대 사회에서 여자를 교환하거나 공유함으로써 부족간의 전쟁을 피했다). 반면 위험을 무릅쓰며 남의 여자를 가로채는 감정적인 행동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 신만이 아는(=아무도 모르는) 일이 된다. 즉 그 사건은 파리스가 일으킨 게 아니라, ‘불화’와 ‘미’의 개념적 합작품이라는 뜻이다.
고대의 맥락을 모욕하는 ‘고상한’ 근대인들
여기서 영화는 신을 솎아낸다. 따라서 신의 몫이었던 암투와 욕망이 온전히 ‘인간’의 몫으로 돌려진다. 즉 인간이었던 그들이 어쩌자고 무모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트로이>는 신의 자리에 ‘인간’이 아닌 ‘개인’을 집어넣는다. ‘인간들의 역사 쓰기’가 이루어져야 하는 자리에 영화는 안이하게도, 혹은 불순하게도 ‘(특권적) 개인들의 사생활 쓰기’를 채워넣고 있다.
이 영화에는 인간이 딱 세명 나온다. 자발적 의지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색정남녀’ 두명과 ‘회의하는 아킬레스’가 그들이다. 정략이 배제된 개인들간의 자유연애가 찬양/고무된 역사가 불과 200년 남짓이라지만, 3200년 전이라고 해서 한눈에 반하는 열정적 사랑이 없으란 법은 없다. 헬레네와 파리스가 부족적 사고를 일체 배제하고 오로지 고독한 개인으로서 사랑했다 치자. 그들의 ‘개인적 사랑’은 ‘부족국가간 전쟁’을 일으킨다. ‘개인’과 ‘부족국가’ 사이에 당연히 부족민들이 있어야겠지만, 영화 속에선 아무도 없다.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귀족 중에서도 전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하다못해 헥토르의 아내 역시 “잘난 네년의 화냥질 때문에 내 남편 죽었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세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목적으로 참전했지만, 명분없는 전쟁에 출정을 회의하는 아킬레스 역시 고독한 ‘개인’이다. 브리세이스 때문에 아가멤논과 틀어지기 전부터 그는 충직하고 신실한 장군이 아니라 삐딱하고 쿨한 ‘터프가이’였다. 그는 고대의 영웅도 현대의 영웅도 아니다. 고대의 영웅이라면 “개죽음” 운운하며 전쟁을 회의할 수 없고, 현대의 영웅이라면 명분 없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회의하는 전쟁을 (원수를 갚느라) 승리로 이끄는 자가당착적 분열자이다.
그러면 고대의 이야기를 어떻게 현대식으로 기술하냐고? 소박하지만 재미있는 영화, <황산벌>을 떠올려보자. 계백과 김유신은 모두 자신의 역사적, 개인적 명분과 맥락이 있었다. 물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당시의 맥락들이다. 현대적 관점의 산물인 ‘전쟁에 대한 회의’ 역시 영화 속에 깃들여 있다. 그러나 영웅의 입이 아니라, 역사 속에 파묻혔던 타자(他者)인 ‘계백의 처’와 ‘거시기’를 통해 말해진다. 장군들만 사람이 아니요, 전쟁은 전쟁영웅을 통해 반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세명의 ‘고대인의 탈을 쓴 근대인’과 나머지는 모두 컴퓨터그래픽(CG)에 불과한 허깨비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킬레스가 군인들을 일컬어 “소모품” 운운하였건만, 감독이야말로 그들을 소모품 취급한다. 심지어 헥토르까지 포함해서 그들은 다만 그 자리에 배치되어 있을 뿐, 사람으로서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않는다. 흡사 ‘애니메이션 배경에 실사인물영화’가 떠오를 지경이다. 전쟁을 특권화된 개인들의 서사로 말하는 것, 더욱이 ‘전쟁을 회의하는 전쟁영웅’의 이야기는 극히 위험하다. 빈 라덴과 후세인과 부시의 싸움으로 전쟁 이야기를 엮어대는 것, ‘전쟁은 원치 않지만, 원수를 갚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궤변을 결코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