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수다스럽다. 대답 하나가 네댓개의 질문을 아우른다. 다음 질문을 생각하는 상대의 머릿속을 읽는 듯, 알아서 답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아파트 아이”로 별다른 말썽없이 살아온 삶, “여자친구가 대신 응시해준 탤런트 공채에 우연히 합격한” 뻔한(?) 이야기라도, 듣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빨려든다. 시쳇말로 ‘말발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듣는 와중에 눈치없이 끼어들면 면박당하기 십상이다. “아, 글쎄 끝까지 좀 들어보세요.” TV 속에서 그가 보여줬던 점잖은 이미지와 실제 그의 모습이 대비되는 느낌이 묘하다.
영화전문지 인터뷰는 처음인 신인 영화배우지만, 96년 SBS 탤런트 공채 출신인 류진이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는 <비단향 꽃무> <순정> 등 적지 않다. 그 정도의 만만찮은 경력과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가 주연급 ‘스타’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나, 섬세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꽃미남’ 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지 않은 것은,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다. 게다가 스크린 데뷔작인 <령>에서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지원(김하늘)을 돌봐주는 사려 깊은 남자친구를 연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태껏 브라운관에서 선보였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류진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다. “내가 출연을 결정할 당시에는 내 캐릭터들이 원래 그렇게 한결같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때로 다른 등장인물들이 모두 푼수 같거나, 경쾌한 캐릭터로 변해가기도 한다. 그럴 때는 누군가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데, 하필 그게 나였던 거다. 여러 가지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그럴 때는 해가 되더라. <령>에서도 원래는 실제 나의 모습에 가까운 캐릭터를 생각했는데,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내 생각을 접은 경우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영화에 첫발을 제대로 디디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룬 것도 없이 경력만 쌓였다고 투덜대는 류진은 별다른 욕심이 없는 사람 같다. 나름대로 브라운관의 스타인데, 한쪽짜리 기사가 서운하지 않냐는 질문에 “정말요? 그러면 안 되는데”라며 대꾸하거나, “에드워드 노튼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순식간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 뭐, 하다 안 되면 그만이고”라고 말하는 모습이 심드렁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초연함이,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 특유의 여유인 듯 예사롭지 않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아주 조금씩 나아졌던 것 같다. 연기에 진심을 담을 수 있는 비율이 더디긴 해도 점점 높아지고 있음에 만족한다.” 중요한 것은 그의 표현대로 그가 또 다른 영역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랫동안 꾸준히 앞을 향해 걸어왔고, 그런 사람들은 쉽게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