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와 함께 돌아온 오토모 가쓰히로
홍보 문구 같지만 별수가 없다. <아키라>(1988) 이래 무려 16년을 기다려온 오토모 가쓰히로 감독의 새 장편애니메이션 <스팀보이>가 ‘드디어’ 7월17일 일본에서 개봉한다. 기획부터 꼬박 10년, 총제작비 24억엔(260여억원), 18만매에 달하는 방대한 작업량과 디지털 기술을 사용해 애니메이션의 촬영한계를 넘어선 화면 등 화제를 몰기 시작한 이 작품은 올해 일본에서 <이노센스> <캐산> <큐티 하니> <애플시드>를 통해 이미 시작된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경계 허물기’라는 성과의 중간결산 작품으로 손색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오토모의 영화라기에는 너무나 ‘정직한’ 소년 성장영화라는 사실이다. 그는 <아키라>의 암울한 미래 세계를 떠난 듯 보인다. 스스로도 <철완 아톰>의 오마주라 말했지만, 오토모는 <스팀보이>를 통해 자신이 데즈카 오사무의 ‘적자’임을 선언하는 듯하다.
‘스팀볼’을 둘러싼 19세기 산업혁명기의 모험
<스팀보이>의 배경은 1866년 영국. 직접적인 배경은 실제로는 1851년 열렸던 인류 근대의 상징, 제1회 런던 만국박람회다. 맨체스터에 사는 레이는 발명가인 할아버지 로이드, 아버지 에디의 피를 이어받아 기계와 발명에 관심이 많은 13살 소년이다. 미국에 연구차 떠나 있던 할아버지로부터 소포가 배달되던 날, 그의 집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구지원을 해주는 미국 오하라 재단 사람들이 소포를 빼앗으러 들이닥친다. 소포 안엔 “절대 아무에게도 건네주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편지와 함께 축구공 크기의 ‘스팀볼’이 들어 있다. 고도의 압축기술을 통해 거대한 보일러가 없이 증기에너지를 압축시켜놓은 가공할 만한 위력의 스팀볼을 둘러싸고 만국박람회장을 무대로 레이의 모험이 펼쳐진다.
<스팀보이>가 쉴새없이 선보이는 기계들은 SF영화 못지않게 흥미롭다. 도망치는 레이가 타고 달리는 외발 자전거, 기차에 올라탄 레이를 납치하기 위해 공중에서 등장하는 게발 달린 비행선, 증기병사까지 모든 기계들은 증기를 동력으로 삼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증기’다. <스팀보이>의 구상은 옴니버스 작품 <메모리스>(1995)에서 오토모가 감독한 단편 <대포의 거리>에서 시작됐다.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 단 한컷으로 완성했던 <대포의 거리>를 만들면서, 오토모는 증기와 기계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대포의 거리>가 1차 세계대전의 유럽 같은 이미지라면, 좀더 거슬러올라가 그런 기계와 철의 시대를 가져온 산업혁명기를 그려보자 싶었다. 마침 디지털 기술이 속속 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스팀보이>가 2시간6분 동안 쉴새없이 선보이는 메카닉스(기계)는 SF영화 못지않게 흥미롭다. 도망치는 레이가 타고 달리는 외발 자전거, 기차에 올라탄 레이를 납치하기 위해 공중에서 등장하는 게발 달린 비행선, 오하라 재단이 발명한 비행병사, 증기병사까지 모든 기계들은 증기를 동력으로 삼고 있다. 사람의 손으로 그린 원화에 디지털 기술로 복잡한 구조를 보충한 기차나 기계들의 거칠게 녹슨 쇠의 질감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SF영화의 기계들이 인간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스팀보이>의 기계들은 19세기 후반 있음직했던 것들이다. 물론 실제 그런 기계들이 있지는 않았을 터. ‘진짜 리얼한 건 아니지만 리얼하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스팀보이> 기계들의 매력이고 이런 인상은 영화 전체의 이미지와도 맞닿는다. 마침내 작품 절정 부분에 나오는 ‘엄청난’ 기계, 그리고 폭발. <아키라>에서 <메트로폴리스>(각본)에 이르기까지 오토모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폭발은 여전히 압도적이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모든 것이 파괴된 뒤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폭발장면은 그의 인장이 되어버렸다.
지브리가 아니라도 성공할까?
어느 날 레이가 받은 소포 안엔 “절대 아무에게도 건네주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편지와 함께 ‘스팀볼’이 들어 있다. 고도의 압축기술을 통해 거대한 보일러없이 증기에너지를 압축시켜놓은 가공할 만한 위력의 스팀볼을 둘러싸고 만국박람회장을 무대로 레이의 모험이 펼쳐진다.
오토모는 발명과 속도의 경쟁 시대에 3대 부자의 갈등이라는 드라마를 짜넣었다. 과학이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라 믿는 아버지, 이에 반대하는 할아버지, 돈을 위해 과학을 이용한 무기 장사에 나서는 오하라 재단이 벌이는 갈등은 전쟁의 역사 20세기의 전조다. 마지막 ‘기계’의 대폭발 이후 아버지는 말한다. “인류가 이것을 봤다. 파괴되더라도 누군가는 또 만들 것이다.” 그런 면에서 <스팀보이>를 <아키라>와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아키라>의 어두운 미래를 잉태하는 시대의 이야기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런 추론 없이도 영화는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 즐기기에 충분하다. 강한 성격의 주요 등장인물이 많아 때로는 갈등이 단순화된 감이 있지만, 전형적인 주인공의 캐릭터를 벗어난 오하라 재단의 손녀 스칼렛, ‘국가없이 개인의 행복은 없다’라는 과학자 스티븐슨(‘철도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의 아들로 나온다) 같은 인물은 흥미롭다. 어린이 눈에 맞춰 상영시간 100분 이후부터 계속 배치한 액션장면과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마음이 푸근해지는 후일담은 치밀하게 계산돼 있고 할리우드의 힘을 빌린 음악 또한 박력있다. 삽화체까지 등장시켰던 <대포의 거리>의 실험정신 같은 건 볼 수 없지만 대신 안정적이고 꽉 짜인 느낌이다.
제작담당이 스튜디오 4℃에서 중간에 선라이즈로 바뀌고 프로덕션 IG의 인력까지 합류하면서 <스팀보이>는 말 그대로 스튜디오 지브리 외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최첨단 인력들이 모인 작품이 됐다. 오토모를 애니메이션계로 이끌었던 린타로 감독은 ‘응원용’ 단편 〈48×61>까지 만들었다. 99년 제작비 조달 등 어려움으로 한동안 제작이 중단되는 고비도 있었지만 <스팀보이>는 지브리 이외의 대작 애니메이션이 일본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를 가늠할 작품으로 지금 영화계의 관심의 집중대상이 되고 있다. 자신의 철학을 곧이 곧대로 쏟아부었던 오시이 마모루의 <이노센스>에 비해 대중적인 <스팀보이>는 승산이 있다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오토모 가쓰히로 감독 인터뷰
"영화란 원래 장난감 상자 같은 것"
10년 동안 감독 스스로 바뀐 점이나 작품에 끼친 영향은 없었나.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이 있었지만 시나리오는 일찌감치 완성했기에 구체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적인 부분에 영향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어린이들에게 꿈을 줄 수 있는 작품’이라 했는데 감독에게 그런 작품이 있었다면.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 <스팀보이>는 <아스트로 보이>(<철완 아톰>의 영문제목)에 대한 오마주다. 아톰의 원자력 대신 ‘증기’를 사용해서 과거를 무대로 하지만 미래로 향해 있는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소년들을 위한 작품 같다.
초등학교 3∼5학년 남학생들이 봤으면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소년들한테는 ‘프라모델(조립식) 영화’ 같을 거다. 영화라는 건 테마도 중요하지만 원래 장난감 상자 같은 면이 있다. 눈앞에 계속해서 본 적이 없는 세계가 펼쳐지며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주인공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아이들이 얼마나 먼, 미지의 세계로 여행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캐릭터들에 대해.
이제까지 내 작품엔 좀체 없었던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캐릭터를 그리고 싶어 레이를 만들었다. 스칼렛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스칼렛 오하라 같은 주인공이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 그대로 쓰게 됐다. 승부욕도 있고 개성 강한 다른 인물들에 눌리지 않은 인상적인 인물이 되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론 애착이 강해 2편으로 <스팀걸>을 만들까도 생각 중이다. (웃음)
※이 인터뷰는 지난 3일 롯폰기에서 열린 기자회견과 <키네마준보> 〈DVD피아> <컷>에 실린 내용을 발췌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