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각. 스튜디오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그 무렵. 육중한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선 사람은 매니저도 아니고, 코디도 아닌, 그날의 주인공이었다(사실 <씨네21> 옥상 스튜디오의 문은 여닫기가 다소 힘들어서, 보통의 여배우들은 매니저를 앞세우고 들어온다). 대외적으로 그는 저절로 미소를 띠게 되는 사랑스러운 CF 퀸이고,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드라마에서는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여인’이다. 하지만 스튜디오 한켠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그는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해 끊임없이 재잘거리지도 않았고, 자신의 바쁜 일정을 앞세워 상대를 긴장시키지도 않았다. 그런 모습은 사실, 청바지 차림의 김정은이 몇달 만에 친구집에 놀러온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인사를 건넬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때때로 조폭 패밀리의 피를 숨기지 못하는 참한 여자(<가문의 영광>), 천연덕스럽게 “졸라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는 다방 레지(<불어라 봄바람>). 그가 출연해서 성공을 거둔 영화들은 그간 김정은이 인기를 끌었던 CF 속 이미지에 기대고 있다. 물론 <나비> 같은 경우도 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실패’라 할 만한 그 영화를, 김정은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잘못 생각한 부분이 좀 있어요. <나비>는 제가 많이 바꾼 영화거든요.” 영화의 실패를 뒤집어쓰는 겸손함이라도, 배우가 자기 때문에 영화가 바뀌었다는 말은 지나친 오버가 아닐까, 싶지만 그는 진짜로 영화를 ‘바꾼’ 장본인이다. “두 남녀의 고향에서의 이야기는 처음 시나리오에 아예 없었어요. 그냥 하룻밤 새 사랑에 빠지는 거였거든요. 근데 전 그런 식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감독님께 그 이유를 장황하게 말씀드렸고, 과거 부분이 첨가된 거예요.”
7월 중순 개봉을 앞둔 로맨틱코미디 <내 남자의 로맨스>에서는 좀더 현실적인 김정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7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김상경)가 톱스타와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노심초사하는, 평범한 여자주인공이다. “사실 김상경씨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한 측면도 있어요. 상경 오빠는 진짜로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 같잖아요. 저도 거기 빌붙어서 그렇게 보이고 싶은 거죠. ‘내가 왜 이렇게 만화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현실감이 없어졌지?’ 이런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평범한 내 남자가 톱스타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상황은 물론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김정은은, 영화 속 톱스타와 대비되어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확신에 차서 ‘이젠 다른 모습을 선보일게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자신은 자연스럽게 한 것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오버라고 하거나, 애드리브라고 하는 통에 이제는 자연스러운게 뭔지도 잘 모르겠다고.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모 포털사이트에서 김정은을 검색하면 그의 취미가 ’애드리브’라고 나온다. “사람들은 ‘부자되세요’ 같은 것도 제가 다 만들어낸 거냐고 물으시는데, 그런 건 다 좋은 대본이나 콘티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사실 별로 애드리브는 없어요. 그냥 제 것처럼 할 뿐이죠.”
즉석 퀴즈 하나. 음식점에 들어선 김정은의 귀에 들려오는 대화 한 토막.“어머, 김정은이다. 가서 사인받을까?”"미쳤니? 왜 쟤한테 사인을 받냐?” 바로 옆에 앉은 그가 들을 것을 뻔히 알 텐데, 옆자리의 그들은 김정은이 친하게 지내는 동료 연예인들까지 들먹이면서 ‘씹어대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김정은의 대처 방법은? 영화 속의 그라면 벌떡 일어나 동그란 눈을 치켜 뜨고 따져야 한다. 그것도 코믹하게. 정답은? 빨리 먹고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것이다. 내숭없이 솔직한 사람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왠지 그런 만화 같은 상황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는 그저 화를 낼 줄 몰라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굴곡도 있었고, 근거없는 추문으로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마약 스캔들에 휘말렸을 때는, 자신을 어떻게든 찍기 위해 넘어지고 밟히면서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의 눈에서 살기마저 느꼈다고. 무고는 증명했지만 상처는 남았다. “여기까지구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깎아내리면 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사진 촬영이 시작되자 음산한 빗소리와 김정은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오버랩된다. “원래 이렇게 소리내지 않으면 잘 못 웃어요.” 맘만 먹으면 오른쪽 왼쪽 구분해서 눈물량도 조절 가능한 우는 연기는 차라리 쉽다. “‘카메라가 이 정도 다가오면 눈물 떨어뜨려주세요’ 그러면, ‘10초 뒤요? 예! 알겠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누구나 다 집중 훈련하면 할 수 있어요. 그보다 어려운 게 얼마나 많은데요. 자연스럽게 웃는 거, 울면서 눈물을 안 흘리는 거….” 그래서 웃는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야 할 때, 그는 쑥스럽더라도 진짜로 웃는다. 웃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일도 재밌게 느껴지고, 그것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러므로 한밤중에 피곤을 잊고 깔깔대며 카메라 앞에 선 그의 웃음소리를 들은 사람은, 그것을 비현실적인 오버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즉석에서 기분따라 바뀌는 애드리브가 절대 아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만의 방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