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는 여자> 배우 정재영
2004-07-01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오계옥
“변신이라니요? 그동안 뭘 얼마나 보여줬다고”

배우 정재영은 어느덧 거칠고, 강하며, 무서운 사내가 돼버렸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와 <실미도>의 상필이의 핏발 선 눈만을 기억하면 충분히 그렇다. 그런 그가 갑자기 소심하고 심각한 남자로 변신해 로맨틱코미디의 주인공이 됐다. 이나영을 그저 ‘아는 여자’라고 말해버리고는 조금씩 감정의 켜를 쌓아가다 극적으로 변신하는 남자 동치성.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는 우리가 그를 너무 일찍 규정하고 자의로 만든 선입견 속에 가둔 건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비중있는 역으로 나온 두편을 보고 내 이미지라고들 말한다. 그리고 세 편째 <아는 여자>에서 변신했다고 한다. 내가 뭘 얼마나 보여줬다고. 그만큼 내가 관심 밖의 영역에 있었다는 거다.” <아는 여자> 이후에 만난 그는 ‘변신’이란 말에 헛웃음을 띠었고, “난 최선책이 아니고 차선책이었다”고 거리낌없이 되풀이 말하는 솔직함으로 일관했으며, 리얼리티 연기의 ‘확신범’이길 자처했다.

-장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건네준 뒤 16시간 만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했다. 지금까지와 다른 소심한 캐릭터인데다 심지어 멜로인데 ‘아, 이거다’ 하고 딱 와닿은 게 있었나.

=어떤 작품이든 장점이 있으니까 하게 되는 거 아닌가. 캐릭터가 좋든 구성이 좋든. 하지만 어떤 작품의 인물은 내 안에도, 내 밖에도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공감할 수 없고 당연히 연기를 할 수도 없다. <아는 여자>는 멜로이지만 코미디 같은 디테일한 재미가 있었다. 장진 감독과 오랜 시간을 해왔고 그의 호흡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깥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모험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감독에게 내가 최선책은 아니고 차선책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있으니까 선택하지 않았겠나. 예전에 한번도 보지 않고 <피도 눈물도 없이>와 <실미도>만 봤으면 절대로 이 배역을 주지는 않았겠지. 무엇보다 난 장진 감독의 코미디가 가진 뉘앙스를 잘 안다.

-<피도 눈물도 없이>와 <실미도>가 있지만 <아는 여자>에서 첫 단독 주연이라는 느낌인데.

=많이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단독 주연이라는 건 분량으로 따지니까 그런 거다.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이나영씨가 나보다 더 잘했다고 본다. 저울로 따져본다면, 나영씨가 맡은 인물이 분량도 적고 풍성한 자기 드라마가 없는데도 전혀 기울지 않는다. 아주 자연스럽게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줬다.

-초기에 마케팅팀이 두 가지 점에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순하고 깨끗한 멜로인데 정재영에 대한 기존의 강한 이미지 때문에 관객의 몰입이 빨리 될 수 있을까, 또 이나영과는 잘 어울릴까 하는.

=지나고 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우려였다. 하지만 나한테 정말 관심이 있었던 이들에겐 그런 우려가 없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면 영화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지도 않았을 게 아닌가. 언론들의 우려였다고나 할까. 내가 믿는 건 감독과 상대배우, 스탭들이었다. 장진 감독도 몇년 만에 찍는 영화이고 한두푼짜리도 아닌데 의구심을 가지고 찍을 수 있겠는가? 그 걱정보다는 사실 내 네임밸류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급으로 어느 정도 자리잡은 상태였다면 ‘어디 변신을 기대해보자’했을 텐데, 나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신반의하지 않았을까. 센 캐릭터로 주·조연급 배우까지 이제 올라왔네 하는 정도였는데, 갑자기 멜로에서 남자주인공 한다니까 말이다.

-마음속으로 어떻게 정리했나.

=아니, 요즘에 생각해보니까 그랬다는 거고,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지. 잘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큰 역이든 작은 역이든 해낼 수가 없다.

-강박이라고 해야 할까, 촬영하면서 자꾸 목덜미를 잡는 게 있었나.

=강박은 없었고, 다만 이런 건 있었다. <실미도> 끝나고 한달 정도 뒤에 바로 <아는 여자> 촬영에 들어갔다. <실미도>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타이밍이 아니었다는 거다. 인터뷰도 계속 <실미도> 건이었고. 나도 모르게 <실미도>의 센 눈빛이 나오려고 하는 부분이 있어 차단하려고 애썼다. 가령, 병원에서 세게 소리지르는 부분은 질러야 한다는 면에선 <실미도>와 같지만 여기선 ‘동치성’스러워야 하니까. 조용조용 말하는 부분은 오히려 쉬웠지만 소리지르는 부분에선 자칫 잘못하면 <실미도>의 상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까. 예민하게 신경을 많이 썼다. 연기를 하다보면 비슷한 캐릭터가 있게 마련이지만 소리를 질러도 분명 다를 것이다. 이런 경우에 좀더 디테일하게 들어가지 못하면 똑같다는 말을 듣는다. 나야 사실 캐릭터가 워낙 달랐으니까 가능했던 거고. 비슷한 캐릭터였다면 똑같다는 말을 들었을 거다.

-시한부 인생이라고 처음부터 설정하고 들어가서 그랬겠지만 시종 감정을 저 밑바닥으로 내려앉히고 가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영화를 우후죽순처럼 찍었다. (웃음) 첫날에 첫신 찍고, 3∼4일 뒤에 끝부분 찍고. 장소별로 모아서 찍으니까. 그래서 어떤 장면에선 재촬영하자고 많이 조르기도 했다. 고민이 많았던 건 어떻게 지속시켜가는가가 아니라 캐릭터를 스타트하는 부분에 있었다. 더 무거워야 하나, 더 가벼워야 하나. 나 때문에 작품이 자꾸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촬영하고 들어오면 만날 고민이 됐다. 재밌는 작품인데 왜 이렇게 무겁지 하고. 그렇다고 가벼워지려고 하면 시한부 인생이라는 설정이 깨지거나 진실의 밀도가 떨어지게 되고. 결국 지금의 모습이 장진 감독과 맞는 것 같다고 합의본 지점이다.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김수현 감독의 <귀여워>를 재밌게 봤는데, 캐릭터 중 정재영의 ‘머시기’가 좋았다. 양아치 같은 건달이지만 속에 뭔가 유약한 게 있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의 내면과 삶이 달라져가는 게 인상적이었다.

=머시기는 조폭영화에 나오는 극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나 <실미도>가 극적인 캐릭터라면, 머시기는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별볼일 없는 건달이다. 실은 이 캐릭터 때문에 건달 세계에서 두달을 살았다. 지방 출신의 건달은 사투리 쓰는 것을 싫어하고 피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말투가 재밌다. 안 그렇습니까 형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형님, 그렇게 말씀하시니까요 형님…. 또 정장 하나를 고이 다리고 다려서 몇달을 입고 다닌다. 자신은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남들 보기에는 후줄근하다. 이런 점들을 살리려고 했다. 내가 생각한 건달의 겉모습과 속마음이 있었는데 잘 표현됐는지는 모르겠다.

-<아는 여자>와 <귀여워>를 놓고 보면 극적인 캐릭터보다 사실적인 캐릭터에 더 장기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건 장기가 아니고 모든 캐릭터는 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극적인 캐릭터라도 그에 어울리는 진실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

-“사랑이 뭔데”라고 동치성이 끊임없이 묻는데, 실제로 사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동치성이 답답해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의 난 그렇지 않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영화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는 것처럼 사랑은 목숨을 버려서라도 쟁취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가 사랑이라는 게 사랑하는 거지 뭐 별건가 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거쳐온 듯하다. 연기와 비슷하다. 추상적이고 공식에 들어맞지도 않고, 교과서에 나와 있지도 않다는 점에서. 이렇게 하는 게 진짜 잘하는 연기라고 생각했다가 조금 지나면 그게 아닌 것 같고. 사랑도, 연기도 답을 찾기가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나이가 들면서 정답이 없다는 걸 아니까 아예 생각 자체를 하기 싫어하기도 하고.

-연기에 대해선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나.

=물론이다. 직업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랑은 이미 이뤘으니까. 결혼한 지 7년 됐으니.

-송강호, 최민식 등을 만나서 연기에 대해 얘기해보면 인간에 대한 공부를 강조한다. 연기에 대한 평소 고민은.

=진실. 어떤 캐릭터건 진실을 표현해야 한다. 코미디건 호러건 스릴러건 다 마찬가지다. 다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다. 두 형님의 말씀처럼 인간의 복잡한 심리다, 라고 한다면 그걸 속에서 보고 드러낼 수 있어야겠지. 진실이 아니면 아무리 테크닉을 부려도 공감받기가 쉽지 않다. 난 아직 멀었지만.

-배우의 카리스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있어야 되겠지. 나쁜 뜻의 폼잡는다가 아니라 좋은 의미의 카리스마는 에너지가 아닐까. 평상시에도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고 연기할 때는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 에너지 자체도 진실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 스크린에서도 제대로 못하는데 평상시에 카리스마를 보이려고 하면 사람들이 욕하겠지.

-장진 사단의 배우라는 꼬리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예전에는 배우로서 약간 기분이 나빴을 때도 있었다. 다른 작품을 잘하지 못했을 때 남들이 잘 안 써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지금이야 <피도 눈물도 없이>와 <실미도>를 거쳐 오랜만에 만나서 한 작품이라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게 관심이라고 느껴져서 좋다. 다만 외형적으로 묶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진식 영화에선 늘 이렇게 한다는 식으로. 연극에서 시작해 영화에서도 계속 같이 한다는 게 사실 한국에선 드문 경우다.

-장진 감독이 작품 욕심도 많고 대단히 치밀하다고들 하지 않나. 별 이유없이 계속 같이 할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친해도 못하면 쓰지 않겠지. 내가 최선책은 아니었고 비슷한 급에선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낫겠다는 판단이 아니겠나. 자기 코드를 나만큼, 우리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시나리오보다 잘 나왔다고 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미 시나리오상에서 이 대목에선 진지하게 하는 게 재밌고, 저기선 좀 가볍게 하는 게 좋겠다는 게 금방 눈에 들어왔다. 장진 감독의 작품을 수십편 봤고 연극과 영화에서 수없이 겪어봤으니까. 감독 입장에서도 편하지 않겠나.

-코믹한 상황과 심각하게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연기가 편한가.

=장단점이 있다. 센 것이 에너지 위주의 연기라면 코믹한 건 세기와는 관계없이 디테일의 승부다. 쳐다보는 것 하나도 ‘그’스럽게 해야 하니까. 코믹은 연기를 하기 전에 더 힘들고 중요하다면, 센 연기는 할 때가 중요하다. 난 둘 모두를 하고 있는 와중이어서 어떤 게 쉽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연기는 머리가 좋아야 한다. 노하우와 본능도 중요하지만 아이큐의 문제다. 내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다. 연기는 두 번째고, 작품을 분석하는 게 첫 번째니까. 감정을 적절히 올리고 내리려면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강호 형이나 민식이 형의 머리가 보통이 아닌 거다.

-<아는 여자>의 반전에 대해서 감독하고 이견은 없었나. 자신의 운명의 변화에 대해 좋아해야 할 것 같은데 끝까지 화내고 절망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 찍고 편집된 걸 보니까 이 선택이 더 잘 맞는다. 사실 처음에는 다른 방향으로 가자고 주장했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이게 더 상투적이지 않다는 걸 알겠더라. 관객이 깜짝 놀라는 ‘호러판타지’ 장면이 원래는 영화 앞부분에 있었는데 뒤로 뺀 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다. 동치성에게 극적인 변화를 설득력 있게 주기 위해. 리얼리티가 아니지만 리얼리티를 더 강화하는 장면이다. 도둑의 등장이나 경기장에서 오열하는 여자의 설정도 리얼리티라는 점에서 보면 황당하고 그 자체로는 판타지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연출의 의도된 장치다.

스타일리스트 신래영, 의상협찬 인터메조·버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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