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커 슐뢴도르프, 베르너 헤어초크, 빔 벤더스, 알렉산더 클루게,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파스빈더(사진). 1960년대 시작된 독일영화 르네상스 운동인 ‘뉴 저먼 시네마’ 5대 기수의 빛나는 이름들이다. 그중에서도 파스빈더는 절정기에 요절, 그 천재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하며 일찌감치 독일영화의 전설이 된 감독이다. 파스빈더를 ‘영화’라는 천공에 결코 지지 않는 별로 등극시키기 위해 기꺼이 그 그늘에 자신을 감추었던 수많은 사람들 중 대표적 인물이 그의 오른팔로 유명했던 시나리오 작가 페터 메르테스하이머다. 평생 자신을 내세울 줄 몰랐던 이 인물이, 칠순을 앞둔 나이에 파스빈더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다가 심장마비로 급사, 독일 영화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비극적 사건의 발단은 6월19일 아침 독일 영화진흥청의 전화였다. 마침 ‘독일영화상’(Deutscher Filmpreis) 시상식이 열리던 그날 오전, 독일 영화아카데미는 내년부터 영화상 심사를 주관하는 문제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 회의 중이었다. 독일 영화계의 대표적 시나리오 작가로 아카데미 위원이었던 메르테스하이머 역시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회의 도중 자신의 신작 프로젝트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영화진흥청의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수십년간 자신의 영예이자 멍에였던 파스빈더 감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 심혈을 기울였던 프로젝트였다. 휴회가 선포되자 메르테스하이머는 가장 먼저 회의장을 뛰쳐나갔다. 메르테스하이머의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인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은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짐작하고 급히 따라나갔지만, 좌절과 분노를 연기에 날려버리고자 담배에 불을 붙이던 친구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메르테스하이머는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눈앞에서 오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슐뢴도르프는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슐뢴도르프는 영화진흥청이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영화아카데미의 귄터 로바흐 총장 역시 메르테스하이머가 없었다면 파스빈더의 전설도 없었을 것이라면서, 감독의 그림자에 가려 평생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했던 노년의 시나리오 작가가 뒤늦은 재기, 또는 독립의 꿈이 좌절되자 생을 놓아버린 것이 너무도 허망하다며 애통해하고 있다.
1937년생인 메르테스하이머는 1970년대 독일 영화계의 대표적인 시나리오 작가로 파스빈더 감독의 TV영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비롯해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롤라> <베로니카 포스의 그리움> 등의 작품을 남겼다. 베를린=진화영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