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킹 아더> LA 현지 시사를 가다
2004-07-07
글 : 이영진
신화가 삭제되고 액션이 배가되다

현대적 전장에서 부활한 아더

그가 명예로운 브리튼의 왕위에 오를 때/ 어떻게 적을 물리쳤는지 그들은 노래했네/ 이틀 동안의 격렬한 싸움에 참가하여/ 팬드래건의 아들답게 그곳을 피로 물들이고/ 3백의 섹슨인을 한손에 쓰러뜨렸네.

아더 왕에 대해 경배를 바쳤던 건 중세 음유시인들만은 아니었다. 20세기 들어서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서 아더 왕의 전설은 수없이 윤색됐다. 약한 자를 돕는 정의의 무용담, 여성을 위하는 기사들의 로맨스, 마법사 멀린과 호수의 여인이 안내하는 판타지, 성배를 찾으러 떠나는 이들의 어드벤처. 이만한 이야기 보따리가 또 있을까. 그러나 판본이 많으면 원치 않아도 비교당하는 법. 아더 왕 이야기를 이번엔 어떻게 변주했는가에 관심이 집중됐던 영화 <킹 아더>의 월드 프리미어가 현지시각으로 6월22일 저녁 7시30분, 미국 LA 새뮤얼 골드윈 극장에서 열렸다.

때는 467년. 15년 동안 전장을 떠돌며 전투를 치러온 아더(클라이브 오언)와 여섯명의 사마시안(지금의 러시아 지역에서 거주하던 기마족) 전사들이 성으로 돌아온다. 로마를 위해 싸워야 하는 의무복무 기간이 끝난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제마누스 주교는 이들에게 전역증명서 대신 마지막 임무를 전달한다. 교황의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는 소년 알렉토를 무사히 데려오라는 것이다. 사마시안 기사들은 이에 발끈하지만, 고민 끝에 그러기로 한 아더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른다. 그러나 알렉토가 있다는 마리우스의 봉토에 도착한 아더 일행. 이곳에서 그들은 악몽 같은 현실과 마주한다. 지하감옥을 만들어 농노가 되기를 거부한 토착민들을 로마인 마리우스가 핍박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심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워드족의 전사 기네비어(키라 나이틀리)와 알렉토를 대동한 아더 일행은 귀환 도중에 로마의 세력이 약화됐음을 눈치채고 호시탐탐 세력 확장을 노리던 섹슨족 무리와 맞닥뜨리는 등 위기에 빠진다.

아더 신화를 축출하고 전쟁 영화로 향하다

<킹 아더>는 우리가 알고 있던 아더 왕을 ‘축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 전투에서 보이듯 아더와 그의 기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생존과 귀향이다. 첫눈에 반한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무모함도, 사랑하는 여인을 가슴에 품고 마상(馬上) 경기를 벌이는 여유도 그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 중세 귀족들의 낭만 가득한 거짓말은 기대하지 말라고 영화는 일찌감치 일러준다. “아더 왕은 중세 작가들이 가공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실존 인물이다.” 제작자인 제리 브룩하이머의 이러한 확신은 시나리오 작가 데이비드 프란조니에게서 나왔다. <글래디에이터>를 쓰는 동안 데이비드 프란조니는 5세기에 살았던 루시우스 아르토리우스 카스투스라는 인물이 아더 왕 전설의 모델이었다는 논문을 봤고, 당시 시대상황을 바탕으로 <킹 아더>의 시나리오를 썼다. 대제국 로마의 힘이 쇠하자 백가쟁명의 시대에 빠져든 영국을 배경으로 아더 왕은 새로 태어난 셈이다. 극중 아더 왕이 로마인과 브리튼의 피가 섞인 혼혈이고, 그를 뒤따르는 기사들은 로마제국에 고용된 용병으로 나오는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 설정.

여기서 그치지 않고 <킹 아더>는 원전이 품고 있던 신화적인 기운을 모조리 제거한다. 그게 <킹 아더>가 선택한 차별 전략이다. 욕망과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둔한 인간들의 세계를 휘젓는 마법사의 간계를 제쳐두는 것은 물론이다. 아더 왕에 관한 모든 서사에서 주요 캐릭터인 마법사 멀린은 토착민의 정신적 지주로만 나온다. 아더에게 브리튼의 자식임을, 그래서 브리튼 왕국을 건설해야 함을 설득하지만, 그는 현명한 노인일 뿐이다. 앙꼬처럼 등장했던 엑스칼리버 에피소드 또한 빠지고 없다. 엑스칼리버는 그저 아더 왕이 찬 칼이다. 후반부에 엑스칼리버에 얽힌 사연이 소개되지만, 신성스러운 물건이 아니라 아더가 브리튼 사람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다. 란슬롯을 비롯하여 제각기 스타일을 뽐내던 기사들 또한 브리튼 왕국을 건설하는 데 복무하느라 사연을 털어놓을 시간을 갖지 못한다. 다만 기네비어만이 예외다. 란슬롯과의 로맨스를 잃지만, 그녀는 힘을 얻는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모계사회의 부족장으로 설정된” 그녀는 아더와 함께 말을 타고 섹슨족과 맞서는 대열에 합류한다. 그리곤 아더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가장 총명하고 용맹스러운 기사로 전해져 내려오는 란슬롯(맨 왼쪽)은 이번 영화에서는 역할이 대폭 축소됐다. (오른쪽 사진 맨 왼쪽)

제리 브룩하이머가 아더 왕 이야기의 무게 중심을 이처럼 이동시킨 의도는 비교적 뚜렷해 보인다. 인물들이 말을 타고 시대극 의상으로 바꿔입었을 뿐 <킹 아더>는 현대 전쟁영화의 상황들을 고스란히 끌어온다. 사지(死地)에서 벗어나 안락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기사들과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자신이 믿었던 신념이 틀렸음을 확인하고 고뇌하는 아더 때문만은 아니다. 뮤직비디오와 CF 감독 출신으로 <리플레이스먼트 킬러> <트레이닝 데이> 등의 영화에서 액션장면 연출과 편집에 소질을 보였던 안톤 후쿠아는 <킹 아더>의 전투장면을 20세기 전장처럼 꾸미고 싶어한다. 섹슨족과 벌이는 빙판 전투에서 아더 일행은 고작 칼과 도끼, 그리고 화살밖에 없다. 하지만 전투는 총탄이 빗발치는 듯한 사운드와 컴퓨터그래픽(CG)으로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데이비드 프란조니는 몇몇 장면에서 “베트남 전쟁을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할 정도다. 비교적 원전에 충실한 존 부어맨의 <엑스칼리버>(1983)를 어릴 적에 즐겨봤다는 안톤 후쿠아 감독은 정작 자신의 영화에선 “폭력과 죽음을 그려보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원전의 풍부한 캐릭터와 환상적인 배경을 포기한 대신 <킹 아더>는 액션을 배로 불려넣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를 시작으로 제리 브룩하이머 사단에 합류한 키라 나이틀리를 제외하고는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국 배우들을 대거 기용한 제리 브룩하이머의 배짱이 과연 먹혀들지도 관심의 초점이다. 아더 역을 맡은 클라이브 오언은 영국 로열아카데미연기학교를 졸업한 뒤 드라마 시리즈에 출연했고, <고스포드 파크> 등 10여편의 영화에서 단역을 맡다 엑스칼리버의 주인공이 됐다. <킹 아더>에선 기네비어의 역할이 높아진 데다 개봉을 앞두고 키라 나이틀리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밀렸지만, 극중 정확한 발성으로 탄탄한 기본기를 내보인다.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는 하드리안 성벽은 길이만 1km에 달하며, 많을 때는 벽 작업을 위해서 무려 300명이 넘는 전문 스탭들이 달라붙어서 만든 결과물이라 화제를 모았다. 사실적인 느낌을 최대한 전달하기 위해 최소한의 CG만을 쓰고, 액션 또한 배우들이 대부분 직접 해냈다고 제작진은 수차례 강조했다. 7월7일 미국에서 개봉한 뒤 국내에선 7월23일 위용을 선보인다.

귀네비어 역 키라 나이틀리 인터뷰

전통적인 귀네비어를 상상하지 말라

<킹 아더>의 기네비어는 아더에게 점찍히는 것이 아니라 아더를 제 편으로 만드는 능동적인 위치를 점한다. 그녀가 속한 부족의 이름 워즈(woads)는 식물즙에서 짜낸 푸른색 물감에서 연유. 전투시에 이들은 청색 물감을 얼굴 등에 바르고 적과 싸운다.

키라 나이틀리는 거침없다. 망아지마냥 요란하게 들어오더니 부끄럼없이 한마디 던진다. 화장실이 급하다고. 인터뷰 자세도 가관이다. 신발을 벗고 선머슴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오렌지 쥬스를 홀짝거린다. 하지만 답변을 할 때만큼은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또박또박 답한다. <슈팅 라이크 베컴> <러브 액츄얼리>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 등 지난 1∼2년 동안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킨 키라 나이틀리는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신성. 이번 영화에선 적의 정수리에 화살을 날리는 여전사 귀네비어 역할을 맡았다.

캐릭터가 파격이다.

아더 왕에 관한 이야기라고 들었을 때 회의적이었다. 이미 수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는데 지금 다시 만들 필요가 있나. 그런데 시나리오를 받아보니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사실에 입각했지만 기존 캐릭터와 달랐다. 귀네비어를 모계사회의 리더로 그린 것이 흥미로웠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귀네비어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촬영 전에 전투장면을 위해 트레이닝을 했을 텐데.

모든 장면을 대역없이 해야 했다. 강한 귀네비어가 되기 위해서 크랭크인 전부터 석달 동안 훈련에 시간을 쏟았다. 남자처럼 싸우려면 팔에 근육이 붙어야 하는 것 아닌가. 복싱, 검술, 활궁 등에 매일 7시간을 투자했다. 촬영이 없을 때에도 개인 트레이너와 함께 체육관에서 연습했다.

성격이 활달해서 운동을 즐길 것 같은데.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웃음) 특히 혼자 헬스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좋아했던 것도 팀을 이뤄 하는 것들이었다. 지금이야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야 하니까 그걸 할 수가 없다. 혹시 좋은 아이디어 있나? (웃음)

귀네비어의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도망갔을 것 같다. (웃음) 그녀는 삶을 위해 매일매일 투쟁한다. 그녀의 믿음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나 자신도 만약에 강력한 리더나 신념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목숨걸고 싸우겠지만. 글쎄. 지금의 나는 잘 모르겠다.

작가이고 배우인 부모님이 당신의 지금 모습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나는 매우 창의적인 가족들 사이에서 자라났고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연극 같은 것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만들어준 것도 부모님이다. 반면 프로페셔널한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걱정하셨다. 왜냐하면 안전하지 않은 직업이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고 있고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중성적이고 에너제틱한 여성을 주로 연기해왔다. 요즘 그런 캐릭터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 그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킹 아더>는 <슈팅 라이크 베컴>과 다르고, <캐리비안의 해적…>과도 다르다. 그런 점에서 난 행운아다. 전과 다른 역할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

이제 스타덤에 올랐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본다는 게 다르긴 하다. 그래봐야 “영화 너무 좋았어요” 하는 정도다. 그러나 나는 2년 동안 일하기를 멈춘 적이 없고, 여전히 이야기꾼으로서의 배우의 삶을 만끽하고 있다.

사진제공 브에나비스타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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