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창의성 없는 공포영화 <페이스>와 <령>
2004-07-07
글 : 심영섭 (평론가)

※요주의: 스포일러 경고. <령>이나 <페이스>를 보신 분, 혹은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신 분만 읽으세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그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마디로 불행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졌다. 그런데 불행히도 공포영화 <페이스>의 불행에는 이 ‘여러 가지’의 얼굴이 없다. 베타 알레르기에 걸린 소녀는 하필이면 심장이 나쁘고, 하필이면 엄마를 잃었는데 하필이면 귀신을 본다. 이 소녀의 불행은 단 하나 귀신을 본다는 데 있다. 타이 공포영화 <디 아이>에선 눈을 이식받은 처녀가 귀신을 보지만, 이번엔 심장을 이식받은 소녀가 귀신을 본다. 이런 공식으로 하면 귀신을 ‘보는 게’ 아니라 귀신을 ‘느껴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아주 이상하게도 이 소녀의 아버지는 얼굴이 없어진 두개골에 얼굴을 되돌려주는 복원 전문가인데 그 역시 귀신을 본다. <왓 라이즈 비니스>의 아줌마는 물속의 처녀 귀신을 보지만, <페이스>의 이 아저씨는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본다. 또한 <페이스>의 이 귀신은 <식스 센스>처럼 자신이 인간인 척하기까지 한다. 당근 인간들에게 하소연할 게 많은 처녀귀신은 때론 스파이더 맨처럼 벽 천장에 붙어 있고, 때론 마룻바닥에서 머리를 헤쳐 풀고 마룻장을 뚫고 나온다.

대한민국 공포 공식 : 할리우드식 ‘반전’ + 일본식 ‘분위기’

한때 우리나라의 여름 그러니까 2000년 대한민국 극장가는 <하피>니 <해변으로 가다>니 <찍히면 죽는다>라고 해서 할리우드의 슬래시 장르를 대한한국의 공포영화에 이식시킨 한국산 공포영화들이 극장을 도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들이 흥행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 뒤, 한국 공포영화들은 동양적 공포의 구현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변모하는 할리우드의 ‘반전 공식’과 일본 공포영화의 ‘분위기’를 리믹스하는 새로운 공포영화 공식을 선보이고 있다. 즉 <령>이나 <페이스>뿐 아니라 <장화, 홍련>이나 〈4인용 식탁> <거울 속으로> 등에 이르까지 이즈음의 한국영화들은 <식스 센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반전에 대한 강박과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그 경계를 무디게 하는 낮이나 밤이나 출몰하는 귀신 보기의 삼매경에 빠져든다. 이러한 점은 소재만 다를 뿐 <령>에서도 반복된다. 4명의 여고동창생은 한명의 소녀를 왕따시킨 뒤 차례로 귀신을 영접하는데 <페이스>와 마찬가지로 마룻장을 뚫고 등장하는 처녀귀신의 압도적인 이미지는 어딘가 일본 공포영화 <링>의 산발한 여자귀신을 닮았다. 서로 커닝했을 리도 없는 두 공포영화에서 똑같이 마룻장을 뚫고 나타나는 여자귀신이라니, 이쯤 되면, <식스 센스>와 <링> 두 영화는 한국 공포영화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면 찍으면 ‘남’이 되듯, ‘링’이라는 글자에 점 두개만 찍으면 ‘령’이 된다나 뭐라나.

한국 공포영화의 깜짝쇼 증후군

최근 한국 공포영화들을 보다보면, 무서워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깜짝 놀라서, 물리적으로 심장이 덜컹 거려서 ‘지금 내가 무서운 거니?’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시각적 자극보다 한발 먼저 앞서 다가오는 날선 소리의 기습은 일종의 깜짝쇼로서 한국의 공포영화들을 난형난제로 만들어버리는 꼴이다. 이런 깜짝쇼 증후군은 안병기 감독의 <가위> 때부터 부쩍 심해져오더니 급기야는 진저리나는 금속성의 굉음으로 관객의 신경을 북북 긋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많은 피, 더 많은 사지절단의 난도질, 더 많은 희생자들이 아니라 더 많은 날선 소리들, 더 많은 급작스런 귀신의 얼굴 클로즈업, 더 많은 초점 이동으로 가득 찬 한국의 공포영화들은 이제 ‘피에서 물로’ 그 밀도를 바꾸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최근 대한민국의 공포영화는 앙꼬없는 찐빵처럼 공포 그 자체가 스르륵스르륵 빠져나간다. 공포영화가 우리 사회의 미만한 공포를 담아내는 일종의 핏물로 만들어진 쓰레기통이라면, 2000년 이후 한국의 공포영화들에는 이상하게도 깊은 무의식에 자생하는 으스스한 독버섯 같은 공포를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례로 전면적인 모성 이데올로기에 싸움을 걸었던 〈4인용 식탁>을 제외하고 <여고괴담> 이후 많은 공포영화들은, <령>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앞으로 나올 <분신사바> 등은 여고생들 사이에 존재하는 ‘왕따’ 현상이나 ‘동성애’ 현상을 다루고 있다. 사실 왕따야 <캐리> 이후 유구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캐리>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돼지피를 뒤집어쓴 소녀, 즉 월경하는 소녀의 이미지로 고취된 여권신장으로 쑥쑥 변모해가는 여성에 대한 두려움, 70년대의 무의식 같은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잘 만든 공포영화라고 생각하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도 바로 그런 빛나는 이미지로서 창의적인 공포가 있었다. 예를 들면 옥상에서 위태롭게 떨어질 것 같은 소녀들이나 학교를 내려다보고 있는 귀신의 눈으로 바라본 새장처럼 변해버린 학교의 이미지 같은 것.

왕따 귀신 이야기에 싫증나서 <페이스>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아 이제 대한민국 여성들의 무의식을 파고든 성형수술에 대한 욕망과 공포, ‘얼굴없는 미녀’, ‘썩어가는 마이클 잭슨’식 공포를 보게 됐군, 이라며 좋아했었다. 물론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페이스>의 공포는 장기이식과 연관된 살인, 그리고 귀신을 본다는 그 하나로 일관한다. 참으로 답답하다. 성형수술, 몸짱, 명품에 대한 욕망, 웰빙이라는 이름의 헛된 사치. 왜 이런 사회적 현상들, 지금 우리의 몸과 핏속에 존재하는 들끓는 욕망들이 아직도 장르영화에 반영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아직도 여고의 담 안에서 한국 공포영화는 맴도는가? 청소년 관객 때문에? 이 분석은 한국의 공포영화의 창의성 없음에 대한 일회성 면죄부에 지나지 않는다.

공포를 쌓아가지 못하는 <페이스>

<장화, 홍련>은 스타일이 있는 공포영화였다. 물론 영화사 봄이 주특기로 하는 청담동 명품 스타일로 벽지만 갈아 끼우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가 되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켰지만. 김지운 감독은 <장화, 홍련>에서 귀신에게도 인간적인 속성과 관점을 부여하고 꿈 너머엔 또 꿈이, 귀신에게는 또 다른 귀신이, 환상 속에는 또 다른 환상이 존재하도록 미로에 가까운 덫을 쳐놓았다. 이건 일종의 장르의 전복이라기보다 반칙과 트릭으로 가득 찬 장르의 교란에 가까웠었다. <페이스>에도 이런 반칙은 존재한다. 귀신을 보는 아이가 소개된 뒤, 우리의 호러 퀸 송윤아는 스킨스쿠버 동아리 회원들과 맥주를 마신다. 벌써 1년 전 이야기인데 현재진행형의 사건 사이에 샌드위치되어 마치 현재에 일어나는 일처럼 교묘히 관객을 속인다. 이건 일종의 관객과 감독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를 깨는 반칙인데, 이렇게 반칙을 감행해야 하는 까닭은 송윤아를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화, 홍련>의 문근영이 살아 있는 사람이여야 했듯이 말이다. 편집의 교란으로 관객을 속이는 반칙은 이제 한국 공포영화의 장르적 공식으로 굳어질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는 스타일은커녕 공포영화로서 ‘톤’조차 제대로 맞지 않는 미숙함을 드러낸다. 공포영화로서 간이 안 맞는 것이다. 복원작업을 하던 신현준은 송윤아에게 ‘그 머리 좀 어떻게 할 수 없어요?’라고 묻는데, 클립으로 슈렉의 머리 모양을 만든 송윤아는 너무나 귀여운 멕 라이언 같아서, 이게 지금 로맨틱코미디인지 호러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다. 무엇보다도 <페이스>는 단편을 잘 만드는 감독이 장편을 잘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는 증명서와도 같다. 유상곤 감독은 귀신의 전면적인 등장을 영화 앞부분에 대부분 배치함으로써, 공포의 씨앗을 너무 일찌감치 뿌리는 ‘악’수를 감행한다. <페이스>의 공포는 너무 일찍 발아해 송윤아와 신현준 사이에 일어나는 로맨스 감정 즈음에는 거의 시들어버리는 형국이다. 물론 여기에는 <퇴마록> 이후 한치의 연기력 향상도 보이지 않는 신현준의 미숙한 발성과 연기도 한몫을 톡톡히 해내지만 말이다. <페이스>에는 점점 싹이 트는 공포, 쌓여가는 공포의 ‘지층’이 부재한다.

<령>, 주제 충돌 속에 길을 잃다

폐쇄된 집, 검은 머리카락, 죽음의 양수로서 ‘물’이라는 일관된 톤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령>은 <페이스>와는 반대로 간은 맞지만 건더기가 없는 공포영화였다. 일본영화 <검은 물 밑에서>를 연상케 하는 ‘물’의 이미지는 왜 한 소녀가 다른 소녀를 그토록 희구하는지,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날선 적대감이 어디에서 근원하는지를 도대체 이어주지 못한 채 화면 사이를 흐물흐물 돌아다닌다. 김하늘이 ‘수영은 엄마 품처럼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대사’를 날리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령>의 물은 일종의 수도관으로서의 신체, 자궁으로서의 착종하는 모성애의 비극을 다루려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모성애의 문제는 왕따 친구들의 복수담과 충돌하면서 방향을 상실한다.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내려는 에피소드 과잉에서 <령>은 길을 잃어버린다. <가위>의 또 다른 이름이 ‘난 네가 지난 대학 시절에 한 일을 알고 있다’이니, <령>의 또 다른 이름은 ‘난 네가 지난 고등학교 시절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이 공포영화에서 김하늘은 기억상실증에 걸렸지만 그건 그저 장치이고, 빈약한 캐릭터와 전형적인 복수의 동기 부여마저 인과응보의 관습 안에서 철저히 봉인되어버린다. 자. 그러니 이 표류하고 있는 2000년 이후의 한국 공포영화를 누가 구원할 것인가? 누가 관객을 통째로 녹여내리는 공포영화 하나 만들 생각 없는가? B급영화의 세계에서 자신의 자양분을 수혈했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남성 감독들이여.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받는 영화도 좋지만, 어디 참한 공포영화, 자신의 출생증명서를 내보일 공포영화 하나 만드실 의향은 없는지. <가위>에 가위눌림이 없듯, <페이스>에 불행의 얼굴이 없듯이, <령>에서 물을 먹는 쪽은 귀신이 아니라 바로 공포를 체험하러온 관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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