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남자만을 바라보며 목놓아 울라, <여친소>
2004-07-07
글 : 김민영 (영화평론가)

<여친소>가 움켜쥐고 있는 소녀의 고통

“꿈- 요소를 의미하는 대체물에서 숨겨진 무의식으로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저항에 부딪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대체물 뒤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은폐(隱蔽)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이 어려움이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어떤 아이가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꼭 움켜쥔 손을 펴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아이가 무언가 옳지 않은 것, 그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프로이트프로이트가 말한 ‘은폐하고자 하는 노력’이 무의식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아이의 펴지 않는 손가락을 견뎌내는 행위라면, 곽재용의 무의식의 부끄러움은 소녀가, 소년의 연인에서 소년의 가족이 되지 못한 지점에서 ‘발병’된다. 곽재용의 멜로가 정소영 감독의 1968년작 <미워도 다시 한 번>류의 ‘통곡’의 관습을 (현재까지) 오매불망 추종하는 이유 역시, “소녀는 연애의 대상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그의 기이한(?) 미신 때문에 일관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곽재용은 왜 소녀가 소년의 영원적 대상자가 되길 그토록! 바라면서도 소녀의 현실적 성장을 억압시키는 것일까?

곽재용의 데뷔작 <비오는 날의 수채화>(1990)부터 최신작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까지, 14년간 그가 만들어온 다섯편의 장편영화간의 비극의 간극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그 비극의 ‘근거’가 곽재용의 ‘소녀’들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질문은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곽재용의 소녀들은 결코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아기적 환상’에 머물고 있는 곽재용의 일관된 욕망은 소녀가 온전한 가정을 완성시키는 어머니나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제구실을 해내는 성인이 아닌- 세상을 떠난 연인의 혼령을 기다리는, 비극의 운명론자(<엽기적인 그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의 지점에서 더이상 성장하길 원치 않는다.

소녀의 현실적 성장을 억압하는 곽재용

<클래식>에서처럼, 소녀가 완전히 어머니 세대로 넘어가는 지점에서도 소녀의 성장을 고의적으로 도외시하려는 곽재용의 이러한 무의식은 잘 드러난다. 소녀는 극 안에서 여성으로 성장하여 어머니가 되는 ‘현실적 성장’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역할을 인형처럼 수행해내는 ‘가짜’ 어머니로서 등장할 뿐이다. 소녀의 성장을 ‘방해’하는 타의적 요소는 그들이 겪는 ‘비극의 이별’을 통해서도 등장한다. 반드시, 죽음이나 사고등의 일련의 비극적 상황을 강요하는 곽재용의 영화적 설정은 소녀들의 성장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고민의 영역을 빼앗고, 사랑하는 남성의 구천행을 바라보며 목놓아 우는 고민만을 “강요”함으로써 성장을 간접적으로 억압시킨다. 이것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의 아이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와 매우 대조적이다. 어머니의 외도를 묵과하는 아버지의 부도덕성에 환멸을 느낀 아이는 스스로의 성장을 멈추고 세상을 향해 양철 북소리와 함께 비명을 내지른다. 이것은 성장의 중단을 스스로 결정한 자의적 책임의 사유를 기성 세대에게 역설적으로 토해내는 행위이다. 즉,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성장의 원인을 가로막은 타자에 대한 비명과 항변으로 거듭날 때 고통의 무게를 확장시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비명과 북치는 행위를 거듭, 반복함으로써 아이는, 외형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각한 내면적 성장통을 스스로 치러낸다. 그러나, 곽재용의 소녀들은 자신들의 성장이 멈춘 것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기이한 사건(?)들로 세상을 떠나고 신체의 일부분을 훼손(<클래식>)당할 때, 그것들을 위해 목놓아 울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곽재용의 소녀들은 여성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느낄 시간이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곽재용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서 드디어, 그 결정적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14년간의 로맨스를 상업적 궤도 위에 서서 그 외형적 부피를 거세게 부풀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녀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을 때, 소녀의 성장이- 연인의 혼령을 위한 축제로 인해 가로막히지 않을 때, 혹은 소녀가 성장하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 스스로 고심할 수 있을 때 소녀는 진짜 “여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곽재용은 깨달아야 한다. 자아 안에 갇힌, 소녀들을 스스로 해방시킬 수 있을 때 곽재용의 “트루 로맨스”는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