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멜로드라마의 틀로 포획된 괴물, <몬스터>
2004-07-14
글 : 김경욱 (영화평론가)

<몬스터>의 에일린이 현실의 에일린보다 덜 비극적인 이유

실재가 너무 가까이 다가올 때 영화라는 환상은 거의 부서지거나,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실재를 얼룩지게 만들거나 혹은 그 자체를 일그러뜨려 외상을 만들어낸다.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에는 성역에 가려 엄청난 진실을 폭로할 수 없었거나 실화라고 믿기 어려운 엽기적 사건의 인물이 주인공이라면, 영화적 재현은 좀더 미묘해진다. 종교의 이름으로 무고한 여자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억압하고 착취했던 사실을 고발하는 <막달레나 시스터즈>, 1972년 1월31일 일요일,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의 데리시에서 자행한 학살 현장을 생중계하듯 재현하는 <블러디 선데이>가 전자의 경우로서 영화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면, 패티 젠킨스 감독의 <몬스터>는 후자에 속한다.

여섯명의 남자를 살해한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에 매춘부이자 남자를 증오하는 레즈비언, 말하자면 살아 있는 인간 ‘괴물’(?)의 이름은 에일린 워노스이다. 이미 그녀에 관한 두편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는데, 닉 브룸필드가 연출한 <에일린 워노스: 연쇄살인범 팔아먹기>는 친엄마까지 포함된 에일린의 주변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돈벌이로 이용했는지를 고발하고 있고, <에일린: 연쇄살인범의 삶과 죽음>은 에일린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사형제도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젠킨스 감독은 에일린이 경찰에 체포되기 전의 마지막 1년을 영화로 재현했다. 그 1년 동안, 거의 인생을 자포자기한 에일린은 레즈비언 소녀 셀비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연쇄살인범이 되었다. 젠킨스는 에일린과 셀비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에일린을 잔혹한 살인자가 아니라 동정할 만한 희생자의 자리에 갖다놓는다. 에일린은 어린 시절부터 성폭행에 시달렸고, 일찍이 미혼모가 되었으며, 매춘으로 동생을 먹여살리다 들키자 집을 떠나 매춘부로 살아왔다. 에일린의 첫 번째 살인은 변태적인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려다 행해진 정당방위였는데, 셀비와 함께 사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려고 어쩔 수 없이 계속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에일린이 살인까지 하며 희망의 실마리가 되었던 셀비는 불행하게도 지독하게 유치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왕따당하던 18살 레즈비언 셀비는 부모에게 벗어나 자유롭게 살려고 에일린을 따라나섰지만, 에일린을 착취했던 남자들처럼 그녀를 이용한다. 그녀는 에일린에게 매춘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오라고 강요하고, 자신의 실수로 경찰의 수배전단이 뿌려지자 에일린을 비난하고, 나중에는 에일린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셀비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에일린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버리는 일종의 팜므파탈이다. 셀비의 안전을 위해 그녀를 떠나보낸 에일린은 절망 속에서 방황하다 만취 상태에서 경찰에 체포된다.

실재 앞에서 주저하는 영화

그렇다. 여기까지 그냥 따라오면 에일린의 삶은 정말 동정할 만하다. 그런데 에일린에 관한 기록을 보면 영화에서 생략된 부분이 사실은 더 끔찍하다. 아버지는 아동학대범으로 교도소에서 자살했고, 15살에 결혼한 어머니는 에일린을 낳기 몇달 전 이혼하고 양육을 포기한 채 두 아이를 자신의 부모에게 맡겼다. 할아버지는 에일린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했으며, 그렇다고 할머니가 따뜻하게 보살핀 것도 아니다. 조부모를 부모로 알고 자라나던 에일린은 12살에 진실을 알게 되었고, 14살에 임신을 하자 어머니 집으로 보내졌는데, 그때 낳은 아들은 입양되었다. 함께 살던 어머니와 계속 불화를 겪자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와 히치하이킹과 매춘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유일하게 혈육의 정을 나누던 오빠는 21살에 암으로 죽고, 할아버지는 자살했다. 짧은 결혼 생활을 했던 남편은 에일린이 폭행혐의로 수감되자 ‘돈만 밝히는 폭력적인 여자’라며 그녀에게 불리한 주장을 폈다. 도둑질, 강도 등의 범죄로 감옥을 드나들며 매춘 생활을 계속하던 그녀는 게이바에서 기이하게도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닮은 레즈비언 타리아 무어를 만나게 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애인과 함께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면서 여섯명의 남자를 살해하고 체포된다. 에일린과 함께 지명수배된 타리아는 경찰에 적극 협조해 에일린에게 자백을 유도한 다음 공범의 혐의에서 풀려났다. 에일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타리아는 무고하다고 변호했으며,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는 모두 매춘 과정에서 폭력적으로 돌변한 남자들을 방어하다 발생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사과하기도 했으나 10년 동안 사형수로 복역하고 나서는 다시 살인을 저지를지 모른다며 사형을 집행해달라고 자청했다. “내 목숨을 살려둘 의미가 없다. 그건 세금을 낭비하는 일일 뿐”라고 덧붙이면서.

실제의 에일린은 사라지고 샤를리즈 테론만 남다

그런데 영화의 에일린과 현실의 에일린, 두 인물의 비교로부터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왜 영화의 에일린이 현실의 에일린보다 덜 비극적인 것일까? 예를 들어 스케치하듯 빨리 지나가는 에일린의 어린 시절을 보면, 지독하게 불우한 환경보다는 자신의 조건에 걸맞지 않게 배우가 되려는 황당한 꿈을 꾸다가 그 허영기로 인해 매춘부로 끝장나버린 것처럼 보인다. 또는 에일린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대목을 보면, 자신의 현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엉뚱한 인물처럼 보인다. 제대로 된 학교교육을 거의 받아본 적이 없는 그녀가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가 취직시켜달라고 떼를 쓸 때, 사회의 편견이 좌절을 안겨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현실적인 판단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긴다. 셀비에게 장밋빛 미래를 떠들어대는 그녀는 과대망상증 환자일까? 아니면 남자를 닥치는 대로 죽이는 그녀는 피해망상증 환자일까?

특히 이상한 점은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살해되는 인물의 설정이다. 이 마지막 희생자는 ‘아이 둘이 있는데 함께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에일린의 거짓말을 매춘의 유혹이 아니라 진짜로 받아들여 도와주려고 나서는 지극히 선량한 사람이다. 젠킨스는 에일린의 법정 진술을 무시한 채 착한 사람마저 무참히 죽이도록 설정함으로써 그녀의 살인을 정당방위가 아니라 괴물의 행위로 갖다놓는다. 젠킨스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지점으로 몰고 가서 에일린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그 결과 에일린은 인간과 괴물 사이에서 모호해지는데, 여기에는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난처함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살인 그 자체를 용서할 수는 없지만, 연쇄살인범을 사회의 희생자로, 연쇄살인을 정당방위의 결과로만 연출했을 때, 감독으로서는 은연중에 살인 행위 그 자체를 옹호하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직면한다. 따라서 연쇄살인범에 대한 일방적인 동정을 거두고 어떤 공정성을 유지할 필요가 생긴다. 에일린이 유죄인가라는 질문과 에일린은 정당한가라는 질문이 타협을 보는 가운데, 휴머니즘과 실제 사이의 매우 모호한 협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에일린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도록 함으로써 젠킨스는 난처함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정당한 살인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처럼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

<몬스터>는 어떻게든 에일린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끌어들인다. 외로운 ‘철부지’ 레즈비언 소녀와 절망에 빠진 ‘매춘’ 여성의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극적 장치 속에서, 에일린이 사회적 산물인지 아니면 결함 많은 괴물인지에 대한 답을 피해나간다.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쟁점을 무효화시키는 그 과정에서 젠킨스가 상상하는 에일린은 남고 실재의 에일린은 사라진다. 영화의 에일린은 불쌍하고, 동정을 살 만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아슬아슬한 휴머니즘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에일린 사건에서 문제의 초점은 연쇄살인을 저지른 이유만큼이나 사회가 여성 연쇄살인범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도 중요하기 때문에, 에일린은 ‘여성’ 연쇄살인범이 아니라 여성 ‘연쇄살인범’의 자리로 방점이 옮겨가야 한다. 에일린은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했으며 제대로 된 변호사조차 구하지 못했다. 에일린 사건에 대한 탄원서는 남성우월주의와 동성애와 매춘부에 대한 편견이 에일린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몬스터>의 거부할 수 없는 에너지는 에일린의 실화가 아니라 또 다른 실화, 완벽한 미녀에서 추한 매춘부로 변신한 샤를리즈 테론으로부터 분출된다. 테론은 에일린이 되기 위해 말투와 제스처뿐만 아니라 신체의 모든 부분에 수정을 가해야 했지만 살아남은 것은 다시 조명된 에일린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몬스터’의 외모를 갖춘 테론이다. 그래서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려오는 에일린의 내레이션 “나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는 테론의 독백처럼 들리고, <몬스터>는 에일린이 아니라 테론의 연기에 바쳐진 영화 같다.

괴물로 변함으로써 생존하려 했던 여인

차라리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비극성은 에일린이 셀비를 먹여살리려고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오는 남자의 위치에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살인이 필요하게 되고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가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이중의 고통에 처하게 된다. 셀비에게는 남자보다 더 터프한 애인이 되어야 하지만, 이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남자에게 몸을 팔아야 한다. 아이가 둘 딸린 불쌍한 엄마로 연기까지 하면서 남자를 매춘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 불가능한 상황을 견뎌내야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거듭 매춘하려 거리로 나간다. 그 일이 얼마나 지겹고 끔찍한 일인가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면서. 그러나 아빠라고 불러보라고 요구하는 변태적인 남자를 또 만나고 공포와 혐오 속에서 에일린은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남자를 죽이고 안개 속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공포영화에서 괴물을 보여주는 미장센과 비슷한데, 그녀가 이제 괴물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이미지는 또한 에일린의 정신이 완전히 피폐해졌으며, 어쩌면 머리가 정말 이상해진 것일지 모른다고 암시한다. 두개의 거울 속에 분열된 이미지로 보이는 또 다른 장면에서 연쇄살인범 에일린은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거듭 되뇐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괴물로 변신함으로써 그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반석으로 항해하다가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모두와 커다란 모선을 타고 6월6일 구주와 함께 돌아올 것이다. 나는 돌아올 것이다.” 에일린의 마지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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