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도 갈 수 없는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 나보르스키(톰 행크스). 가공의 동유럽국가 크라코치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 사내는 뉴욕 JFK공항에서 고국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국교 단절로 미국에 들어갈 수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 나보르스키는 그냥 공항에 눌러앉는다.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공항 안의 작은 공간만이 그가 거주할 수 있는 유일한 땅이 된다.
스필버그의 <터미널>은 <캐치 미 이프 유 캔>과 마찬가지로 실화에서 출발한 영화다. 1988년, 이란의 난민 메르한 나세리는 유엔에서 발급한 난민 증명서를 도난당하는 바람에 파리의 샤를 드 골 공항에서 살아야 했다. 이 사건은 1993년 프랑스 감독 필립 리오레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다. 아무튼 스필버그가 주목한 것은 실화를 그대로 옮기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가공의 나라를 설정한 것부터 좀더 우화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스필버그는 나보르스키의 반대편에 출입국사무소 직원 프랭크 딕슨(스탠리 투치)을 위치시킨다. 딕슨은 나보르스키가 법을 위반하기를 기다린다. 또는 정치적 망명의사를 표하기를 기대한다. 둘 중 어느 쪽이든 그의 눈앞에 거추장스런 인물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반대로 진행된다. 나보르스키는 몇몇 공항 직원들과 친해지고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가며 빈자들의 영웅이 된다.
미국에서 지난 6월20일 개봉한 <터미널>은 첫주 흥행수입, 약 1900만달러를 기록했다. 스필버그의 영화치곤 적은 액수지만 스필버그의 실패작이라고 단정하긴 힘들다. 평론가들의 반응은 찬반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쪽이다. 로저 에버트, A. O. 스콧 등이 적극 옹호한 반면 찰스 테일러, 피터 트래버스 등은 실망감을 토로했다. 하지만 공통된 평가는 최근 스필버그의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따뜻한 영화라는 점이다. 스필버그가 원래 그렇긴 하지만 최근 영화 가운데 단적으로 휴먼코미디라고 할 작품은 없었다. 지금까지 나온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캐치 미 이프 유 캔> <캐스트 어웨이> <포레스트 검프> 등 톰 행크스의 지난 영화들과 상당 부분 비슷한 면이 있어 보인다. 톰 행크스는 이번에도 누구나 신뢰해도 좋을 인물로 나온다. 캐서린 제타 존스는 스튜어디스 아멜리아 역을 맡았다. 불륜에 빠진 그녀는 누구한테도 털어넣을 수 없는 비밀을 나보르스키에게 말한다. 스필버그는 <터미널>에서 스펙터클 대신 웃음과 감동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