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비평 릴레이]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김소영
2004-07-20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동아시아 문화 기반한 판타지 영화는 없을까

뉴질랜드를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대안적 거점으로 활용한 <반지의 제왕>과 견주자면, 해리 포터 시리즈는 영국 사립학교 기숙사 문화를 판터지의 핵으로 사용하고 있다. 소위 영어권 국가들의 자연 풍광 및 비교적 저렴한 비용의 디지털 기술 그리고 상징적 자원들을 할리우드가 적극적으로 인수하고 있는 셈이다. <스타워즈>가 미국 주도의 우주 공학을 기반으로 미래를 상상하는 시리즈물이라면,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는 앵글로색슨 문화의 유산들에서 판터지의 광맥을 캐내고 있는 것이다.

해리 포터를 비롯한 어린 마술사들의 호그와트 기숙사 생활은 여느 청소년들과 유사한 활동들로 채워진다. 수업을 듣고,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이 있는 반면 때려주고 싶은 경쟁자들이 있다. 기숙사의 빗장 쳐진 방들에 대한 호기심에 젖어들기도 하고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선생님에 대한 애증에 빠지기도 한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그러나 호그와트와 다른 학교와의 결정적 차이는 마법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호그와트를 제외한 전 세계 학교들이 컴퓨터 교육에 몰두하고 있을 때, 해리 포터와 그의 친구들은 컵에 남은 커피 자국으로 미래 읽기, 괴물 쫓아내는 주문 외우기 등 전근대적 마법 학습에 매료되어 있다. 물론 이들이 벌이는 스펙터클한 마술은 디지털 영상화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제공된다. 예컨대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의 새와 말이 혼성된 히포그리프, 학교를 맴도는 유령들, 늑대인간, 그리고 빠른 속도의 부감 숏들은 컴퓨터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들이다.

여하간, “흠.... 컴퓨터는 왜 안 배우나”라고 우리가 중얼거릴 때쯤, 13세의 해리 포터는 마법학교 호그와트로 돌아온다. 그간 배운 마법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은 자신의 부모들을 험담하던 친척 아줌마를 풍선처럼 부풀려 하늘로 날려 보낸 직후다. 한편, 해리 포터가 알게되는 작금 마법세계의 최고의 스캔들은 아즈카반 형무소를 탈출한 시리우스 블랙(게리 올드만)의 행방이다. 또 그를 쫓고 있는 간수 디멘터들이 배회하는 모습이 해리 포터와 그의 친구들을 무서움과 근심에 떨게 한다. 디멘터는 사람의 기억에서 최악의 것을 추출해, 포획된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공포의 그림자 형상을 하고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핵심 중의 하나는 죽은 부모에 대한 해리 포터의 복수극인데, 시리우스 블랙도 바로 그의 부모 살해 용의자다. 전편과 비교하자면,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가장 창의적인 부분은 시간 여행 장면으로, 부모의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드는 <백 투 더 퓨처>등과 달리, 이 영화는 소년이 친구의 도움을 빌어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투마마>로 알려진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은 <크로노스>의 작가이며 <블레이드 2>로 알려진 또 다른 멕시코 감독 길레르모 델 토로와 더불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물을 강도 있는 흑암의 스펙터클로 변모시키고 있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이전 크리스 콜럼버스가 감독했던 2편의 영화들보다 훨씬 더 어둡다. 카메라는 종횡무진 움직이며 그 누구의 시점인지 알 수 없어, 보이지 않는 제3자를 의식하게 하는 공포 영화의 관행 속에서 자연의 거친 풍광과 중세풍의 성을 포착한다.

막 시작된 청소년기의 어떤 우울과 회의, 그리고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그에 따르는 활기를 보통 소년들보다 초자연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소년 마법사들을 통해 풀어나가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는, 판터지와 리얼리티의 절묘한 결합이 이어진다. 그러나 해리 포터를 보면 볼수록 영미 문화권의 것이 아닌 동아시아 문화 서사에 기반한 소녀, 소년들의 팬터지 영화의 출현을 갈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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