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어본다. 2002년 여름 대한민국 전역을 들썩거리게 했던 한국축구대표팀의 황홀한 슛과 <슬램덩크>가 막 인구에 회자될 무렵 농구는 고사하고 스포츠 자체에 백지 상태였던 여고생조차 단숨에 농구의 모든 포지션을 달달 외우게 했던 기적 같고 마법 같던 순간들을. 혹은 수오 마사유키의 <으랏차차 스모부>와 야구치 시노부의 <워터 보이즈> 같은 영화들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처음엔 별볼일 없어 보이던 오합지졸들이 어떻게 자신의 숨겨진 재능과 열정을 발견하고 일생일대의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전진하는가를 유쾌한 웃음과 감동의 적절한 배합으로 완성해냈던 명랑-스포츠-청춘드라마에는 뻔하게 속보이는 공식의 진부함마저 상쇄하는 천진한 즐거움이 있었다. <돌려차기>는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돌려차기>는 캐릭터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코미디다. 태권도라는 운동 자체가 농구라든가 수중발레처럼 화려한 볼거리를, 혹은 긴 시간 동안 세밀한 묘사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세고 태권도부원들이 예선을 거쳐 본선 4강까지 오르는 기나긴 과정을 온전히 태권도 장면으로만 채우기가 힘들어진다. 영화는 여기서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용객이나 다른 부원들인 정대, 혁수, 석봉, 성완 등의 캐릭터들은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부여받았고 그 개성들이 각자의 태권도 ‘변칙’ 스타일화하는 과정을 비교적 무난하게 통과하는 반면, ‘모범생’ 수빈이라든가 민규, ‘못된 엘리트’ 길수 등의 캐릭터에서는 상대적으로 현실감이 박탈당한 편이다. <슬램덩크>에서 백호와 태웅의 라이벌 관계가 흥미진진했던 이유는 두 사람의 매력이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극점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민규나 길수의 매력은 용객에 비해 별다른 디테일을 얻어내지 못했고, 통통 튀는 이야기의 리듬 속에서 줄곧 괜한 무게만 잡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만화적이고 아기자기한 즐거움은 단연 높이 살 만하다. 남상국 감독은 특히 힘주지 않는 장면에서 슬며시 엇박자처럼 끼워놓은 코믹 감각으로 상쾌한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이를테면 용객과 수빈이 “저번엔 내가 미안했어” 등등의 감상적인 대사를 주고받을 때 온몸에 닭살이 돋을 필요가 없는 것이, 그뒤로 “발레부와 함께하는 타이즈‘에’ 밤! 미끈한 발레리노 대기! 빨간 내복 필 지참!”이라 써 있는 현수막이 뚜렷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충근을 찾아간 수빈이 태권도부를 맡아달라고 심각하게 부탁하는 장면에서, 충근과 수빈 사이 원경에 서 있는 꼬마의 어설픈 태권도 동작은 초점을 흐려놓으며 진지함으로의 몰입을 자꾸 방해한다. 그건 심각하게 시야를 교란하는 ‘얼룩’이라기보다는 딴청 피우고 발장난 치다가 가끔 이쪽을 향해 찡긋 눈웃음치며 이 어이없는 상황을 공유하자는 발랄한 청유형에 가까운 유머다.
다시 한번, <돌려차기>는 캐릭터 구축에 있어 절반의 성공만을 거둠으로써 나머지 캐릭터들이 상상력의 경쾌한 호흡에 녹아들지 못하고 산만하게 겉도는 우를 범했다. 또한 여성 캐릭터를 구축함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과연 어떤 여성 관객이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아무 재미가 없는 수빈이나 ‘이 한몸 희생하여 남편 뒷바라지하는’ 신파극 여주인공과 똑같은 길을 걷는 미애(박지연)에게 쉽게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쉽게 지나쳐버릴 수 없는 나머지 절반의 가능성을 기꺼이 주목하게 한다. ‘썰렁함’을 정말 ‘제대로’ 표출할 수 있는 감각과(썰렁함이야말로 이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는 가장 큰 단서가 아닌가),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날 정도로, 입에서 훅훅 단내가 끼칠 정도로 어떤 목표에 몰두하는 건강한 청춘들의 육체를 관음증적 응큼함 없이 응시할 수 있는 깔끔한 시선, 또래의 역할을 맡아 자기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기회를 포착한 대다수의 신인배우들로부터 최대한의 매력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조준된 눈높이 등 이 순진무구하고 긍정문으로 가득한 전형적 청춘물은 투박하면서도 거절하기 힘든 매력을 내비친다.
:: 남상국 감독 인터뷰
“진정성 있는 성장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남상국 감독은 김홍준, 김기덕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틈>이라는 시나리오로, 신인감독 발굴 프로젝트인 NDIF 대상을 받은 적이 있다.<돌려차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6년 전에 처음 구상을 시작했다. 그때 생각한 영화는 휴머니즘적 요소가 강했는데 상업적인 문제 때문에 영화사 몇 군데를 돌다가 접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초 다시 한번 이 프로젝트를 시작해보기로 했고 1주일 만에 아주 다른 성격의 원안이 나왔다. 하지만 주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의 원래 모티브는 <스탠 바이 미>였고, 특히 “마을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지만 내게는 모든 것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라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였다. 그런 식으로 진정성 있는 성장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스토리는 처음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가 확실히 전달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용객이라는 주인공의 본명이 특이하다.
6년 전부터 지어놓은 이름인데, 시나리오 작가 친구랑 매일 붙어다니면서 이름짓기에 열중하다가 무협지적인 이름이 어떨까 하고 농담처럼 시작한 게 실제 이름이 되어버렸다. ‘용맹스런 나그네’라는 이름의 의미와 주인공의 성격이 잘 맞는다는 느낌도 있었다.
액션 안무는 어떤 식으로 짰는가.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누구나 태권도를 배웠지만, 지금은 많이 묻혀지고 별로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 그런 운동이 되어버렸다. 영화의 컨셉은 그렇게 잊혀진 무언가를 복구하는 것이었는데, 두달 동안 무술감독과 의논한 끝에 ‘안무를 일부러 만들지는 말자’라고 결론내렸다. 뭔가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니까. 대신 아이들이 대회에 진출해서 한 단계씩 높아질수록 자연스럽게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해서 고민스러웠다. TV중계로 보는 태권도는 사실 지루하지만, 영화적으로 봤을 때 어떤 식으로 에센스를 뽑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느낌을 살릴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배우들의 연기 지도는 어떤 방식으로 했나.
기본적으로 연기자로서의 틀을 안 갖춘 배우들을 쓰고 싶었다. 한국영화에서 고등학생 역을 실제 고등학생이 아닌 배우들이 연기함으로써 어떤 느낌을 상실해버리는데, <돌려차기>에서는 정말 고등학생과 다른 게 없는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배우들과 처음 미팅할 때도 줄곧 연기하지 마라, 네 기억 속에서 캐릭터 성격과 비슷한 부분을 끄집어내라고 주문했다. 동완이 같은 경우는 실제 성격이 용객이와 많이 닮았다.
화면 곳곳에 슬며시 흘려버리는 듯한 유머 감각이 배치되어 있는데.
몸으로 하는 코미디는 잘 못하고, 시추에이션을 통해 웃음을 끌어내는 상황적인 코미디드라마를 좋아한다. 비단 코미디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라도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유머가 있어야 하고 화면도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전경의 인물들이 중요한 대사를 치고 있을 때 후경에서 또 다른 정보를 누설한다면, 관객이 상황과 인과관계를 복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