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18년차 배우, 처음 울다, <얼굴없는 미녀>의 김혜수
2004-07-21
글 : 박혜명

영화 <얼굴없는 미녀>는 경계성인격장애를 겪는 여자 지수의 죄스러운 기억들과 그녀를 치료하기엔 자기 자신의 상처가 너무 깊은 정신과 의사 석원의 박약한 심리를 멜로 구조로 엮은 영화다. 지수 역을 연기한 김혜수만 놓고 본다면, 옴니버스영화 <쓰리>의 단편 <메모리즈>에서 그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검은 머리를 어지럽게 늘어뜨리며 한맺힌 눈물을 흘렸을 때가 언뜻 연상된다. 그때 그의 선택은 ‘변신’이라고 설명됐었고, 거칠게 말한다면 <얼굴없는 미녀>는 <쓰리>가 있었기에 그에게도 자신있는 선택이 됐을 거라고 넘겨짚어봤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영화예요. 감독님 성향도 너무나 다르고. 무엇보다 <얼굴없는 미녀>는 시작하기까지가 굉장히 복잡하고 힘들었던 영화예요.” 드라마 <장희빈>을 찍고 있는데, 촬영현장에 매니저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드라마 현장에 매니저가 나타나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스캔들이 터졌거나, 제작진과 문제가 생겼거나. 전자일 리는 없고, 후자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데 매니저의 얼굴은 의외로 밝았다. “시나리오를 이렇게 흔들어 보이면서, 누구 거게? 김인식 감독님 거다∼. 이러더라구요. 보지도 않고 ‘나 할게!’ 그랬어요.” 김인식 감독의 전작 <로드무비>가 자신의 취향과 맞았었기 때문에 “경박하지만” 선뜻 내려버린 결정은 이후부터 그를 힘들게 했다. “시나리오를 봤는데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우리 매니저는 너무 좋게 봤다는데, 난 모르겠는 거야. 내가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그렇게도 없나 싶고. (웃음)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영화를 장르로 규정하는 버릇이 생겨버렸잖아요. 그러면 대체 이 시나리오는 무슨 장르인가. 보고 또 보고 했어요.” 하겠다고 말을 던져놓고 계약서를 쓰기까지 수백번 마음을 뒤집었더랬다. 배우로서 욕심이 나도, 시나리오를 들춰보면 다시 어려워지고 자신감이 없어졌다. 복잡하고 피폐한 내면의 여자가 시나리오상으론 아주 단순하고 건조하게 표현돼 있어서 연기의 단서는 없었다. 능력 밖의 일을 욕심내는 것 같아 무기력감과 우울함이 밀려왔다. 스스로가 싫어졌다. 이 상태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서도 한동안 지속됐다.

“오히려 촬영을 시작하면서는 현장에 적응을 해야 하니까 고민이 덜어지더라고요. 근데, 섹스신을, 보통은 뒤에 찍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초반 1주일 안에 촬영하더라고요.” 지수의 삶에 있어 두 번째 힘든 기억이 되는 이 중요한 장면은, 시나리오상에 ‘섹스신’이라는 단 한 단어로만 묘사돼 있었다. 시나리오의 표현들만큼이나 배우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정갈한 감독은 “이게 대체 어떤 종류의 섹스신”이냐고 묻는 김혜수에게 “소프트한 것”이라고만 했다. 촬영 1시간 전, 갑자기 어지럼증과 구토가 밀려왔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뜩이나 낮은 혈압이 뒤통수에서부터 급격하게 곤두박질쳤다. 원신, 원컷이었다. 감정만 유지해도 벅찰 판에 아주 기초적인 것들, 노출 수위를 고려한 움직임, 동선, 카메라와의 거리 따위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20테이크 만에, “고지가 바로 저기다”라는 오기로 신인인 상대배우(한정수)와 호흡을 맞춘 끝에, 겨우 촬영이 끝났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대체 영화가 무엇이관데 이렇게 사람의 피를 말리나.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에요.” 그는 ‘감독님의 의도’가 어떻게 표현됐을지 정말 궁금하다고 했다. “예전엔 감독의 의도나 컨셉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는데, 요즘은 캐릭터를 이해하고 지키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견해라는 건 어차피 다르면 부딪치게 돼 있고 오히려 그 부딪치는 과정이 치열해야 하지 않나….” 지수와 석원의 세계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석원 역을 맡은 김태우하고도 서로 얘기가 많지 않았다고 했다. 감독과도, 상대배우와도 거리를 둔 채 혼자서 몸부림치느라 밤에 매니저에게 전화할 때면 눈물이 났다. “매니저가 그랬어요. 야, 김혜수가 영화 찍다가 울기도 하는구나. (웃음) 나도 몰랐지. 휴우, 대체 영화가 무엇이관데….”

여기까지가 김혜수의 고생담이다. 우리가 듣고 싶어했던, 힘들었을 게 분명한 선택을 한 사람의 한숨소리 말이다. “그걸 나도 어느 순간 세다가 말았는데, 내가 연기한 지가 만으로 18년 됐대요. 마케팅팀에서 친절하게 세주더라고. 내 (로드) 매니저한테 가끔 그래요. 야, 니가 기저귀에 똥칠하고 있을 때 누나는 사인해주고 있었다. (웃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슬라이딩 도어즈>처럼, 내가 연기를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의 삶이 어떻게 달랐을지 한번 보고 싶은 거 있잖아요.” 배우라는 일 속에서 가치관과 자아를 갖게 됐고, 그래서 연기를 자기 모습의 일부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김혜수란 사람은, 자기를 설명하는 이미지의 틀이 누구의 것보다 유연하지 못했고 세간의 평가도 칼 같기만 했었다고, 쿨하게 이야기했다. 모든 걸 다 인정하진 않지만 세게 부인할 생각도 없다는 그에게 <얼굴없는 미녀>는 단순히 변화, 변신이란 말의 동의어는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의 김혜수는, 오랫동안 뿌리와 함께했지만 나무의 굵은 몸통에 가려져 무심코 잘렸던 잔가지들, 그것이 굵은 가지가 되어 흔들리고 있는 모습 같았다. 영국의 얼터너티브와 하드코어, 테크노 장르의 음악을 영화보다 사랑하고, 집에 혼자 틀어박혀 컴퓨터로 음악과 사진을 다운받는 게 취미라는 것, 연극영화과를 다니던 학교 시절엔 학생 작품에서 연기를 하기보다 촬영이나 조명기자재 만지는 일이 좋았고 또 그걸 누구보다 잘했었다는 풋풋한 기억 따위를 알아주는 사람도, 여태껏 그리 많지 않았을 테니까.

사진 김용호 / 의상협찬 안나 수이, 엠포리오 아르마니, 루이 뷔통, 96NY / 스타일리스트 정윤기(인트렌드)·헤어 및 메이크업 이희,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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