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데리시, 뿌리 깊은 신구교간의 갈등과 영국 정부의 차별정책으로 시민들은 폭발 직전이다. 견디다 못한 시민들은 영국 정부에 시민권 보장을 요구하지만 정부는 줄곧 강경 진압으로 묵살한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이런 난제 앞에 시민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성당의 신부는 시위에 대해 회의적이다.그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는 깊은 체념이 서려 있다. 반면 아일랜드공화군(IRA)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그들이 택한 것은 해방을 위한 테러리즘이다.
이런 양극의 가운데에 여전히 비폭력, 평화적 호소만이 문제 해결의 길이라고 믿는 아이반 쿠퍼와 온건한 대다수 시민들이 있다. 하원의원이자 개신교도인 그는 데리시 구교도들의 시민권에 관심하고 구교도인 여성과 사랑을 나누며 또한 간디와 킹 목사의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주의를 신봉하는 휴머니스트이다. 그는 격양되어 있는 주민들을 진정시키며 평화적 시위의 디데이를 잡는다.
1972년 1월31일 일요일 오후 2시. 그러나 그의 이런 순진한 신념과 기대는 시위하는 시민들과 진압 부대원들 사이에 이미 깊게 자리잡은 갈등과 증오의 현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흥분한 시위대의 일부가 대열에서 이탈하여 투석을 하고 이전의 시위에서 피해를 입었던 공수부대원들은 이를 보복의 기회로 삼는다. 곧이어 평화적인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고 순식간에 데리는 공포와 죽음의 도시로 바뀌고 만다. 선량한 의원인 아이반 쿠퍼와 대다수 시민들은 평화적 시위라는 순진한 길을 택한다. 그러나 군인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사정없이 반격하고, 무조건 잡아들여 따끔한 맛을 보여 주고, 공수부대의 진가를 보여주겠다”는 것이 보수적인 시각과 적개심으로 무장한 군인의 속내였다. 그리고 이런 적의는 일부 과격한 시위대의 투석을 계기로 발포라는 보복으로 이어지고 13명이 죽고 14명이 중경상을 입는 심각한 사태를 일으킨다. 시민들의 분노와는 달리 영국 정부와 군인들의 태도도 철저하게 기만적이다. 이 와중에 공수부대 통신병 로마스 일병의 고민은 하나의 빛처럼 다가오지만 진실을 밝힐 만큼 강렬하지는 못하다(광주에서의 당시, 나도 통신병이었고 일병이었다). 로마스 일병은 시민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강경 진압에 대한 저항감을 갖는다. 그러나 그 빛은 동료들의 증오 속에 함몰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군부의 조직적인 기만 앞에 사그라져버리고 만다.
광주의 계시, 어둠이 영원히 승리하지는 못한다
내가 광주에서 경험한 것도 나를 비롯한 인간의 양심에 대한 뼈저린 절망이었다. 광주에서 나는 처음으로 피비린내라는 것을 맡아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역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처참한 살육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그를 목격하면서도 묵인할 수 있었던 나를 비롯한 군인들의 무감각한 내면은 더욱 역겨운 것이었다. 더 나아가 이런 만행으로 집권한 군부는 영웅이 되고 광주의 통곡이 끝나기도 전에 온 국민은 미스 유니버스들의 늘씬한 육체 앞에 넋을 잃고 열광하는 추태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광주에 대한 모독이었을 뿐 아니라 희미하게나마 품고 있던 살육자들에 대한 분노마저 허물어뜨리는 절망이었다.
시위의 전개 과정과 공수부대 투입 그리고 그들의 무자비한 진압과 사격, 사후의 사태 조작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거짓이 진실을, 불의가 정의를 삼키고 선이 악에 패퇴하고 마는 역사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것까지 데리는 80년 광주와 너무도 유사하다. 그러나 실은 광주는 데리와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크기와 깊이의 아픔이다. 데리의 시위는 그들의 시민권을 보장받으려는 시민들의 이해가 걸린 권리 투쟁이었다. 그러나 광주는 이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우발적인 원인을 갖는다. 18, 19일 이틀간에 걸쳐 자행된 7, 11공수 병사들의 진압 작전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이었고 이것이 20, 21일 시내에서 수십만 인파가 시위에 합류하게 된 요인이 된다. 다시 말해 당시 유신헌법 철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같은 소수 시위 주동자들의 이념적인 구호보다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난폭한 행위에 대한 인간적인 의분이 시민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게 했다는 말이다.
또 데리에서의 발포는 수차례 반복된 시위대와의 충돌에서 피해를 입은 군인들의 보복이었지만 광주에서의 만행은 시민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해야 할 아무런 사전 요인이 없다는 점이다. 광주에서의 충돌과 학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일선에 투입된 진압 책임자들에게 지극히 정당한 주장들을 평화적으로 요구하는 시민들을 굴복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여지를 주지 않았던 군 상층부의 집요한 권력에의 의지였다. 사태의 사후 조작의 질과 규모도 마찬가지이다. 사후 집권한 군부가 광주 학살을 은폐, 왜곡하고 미스 유니버스 대회와 올림픽 유치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쾌락과 오락의 도가니로 몰아가며 광주를 외면하게 했던 것은 국민 모두를 살육의 동조자로 만드는 국가적 기만의 백미였다.
데리나 광주는 시민들의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철저하게 패배한다. 살인자들이 영웅이 되고 정부가 강도들의 집단으로 전락하는 순간 선량한 시민들은 폭도가 되고 역사는 암흑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거짓과 불의의 파도가 한동안 진실과 정의의 부표를 삼키지만 그 진실과 정의의 부표는 역사의 지평에 다시 떠오른다. 광주는 이미 오래전 승리자가 되었고 데리는 아직도 승리를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 우리는 머잖아 데리의 진실이 밝혀지고 그가 승리자가 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둠이 일시 빛을 가릴 수는 있으나 빛을 영원히 감추지는 못한다는 하나의 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