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아는 여자> 이연
2004-07-23
글 : 정이현 (소설가)

이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의 주제는 ‘인생역전’ 이다. 사춘기 시절 옆집의 멋진 야구선수 오빠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가슴앓이가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 봤을 평범한 사연이다. 문제는 그 어설픈 짝사랑이 십 여 년이 지나도록 멈추기는커녕 어둠 속에서 점점 더 열렬히 불타오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날. 멀리서 바라보며 애만 태우던 그 남자의 ‘아는 여자’ 가 된다. 그 남자와 얘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뽀뽀도 할 뻔하고, 하물며 한 집에서 잠도 자게 된다. 진심은 통하게 마련인 것을. 남자는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사랑해온 여자의 마음에 감읍한다. 그 여자는 마침내 질긴 짝사랑에서 ‘짝’ 자를 떼어버리게 된 것이다. 실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놀라운 인간승리 다큐멘터리다. “저 남자 내가 찍었다”를 부르짖으며 오늘도 불철주야 스토킹에 매진하고 있는 전국의 여성 스토커들께서 이 영화를 보고 얼마나 희망에 차 기뻐했을 지.

그러나, 나, 이쯤해서 할 말은 해야겠다. 스토커 언니들, 절대로 착각하지 마시라. <아는 여자>의 여주인공은 결코 스토커가 아니다. 스토커에 대하여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다른 사람을 추적하거나 감시함. 다른 사람의 거주지나 자주 가는 장소를 배회함.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어떤 형태로든 침범함. 위의 행위를 의도적으로 두 번 이상 함.’ 모든 규정이 이연이 치성에게 했던 짓거리들과 딱딱 들어맞는다고 흠, 결정적인 한 가지가 남았다. 스토커가 되기에 그 여자는 너무나도 예쁘단 말이다! 남녀상열지사의 구조 속에서 스토커는 도저히 예쁠 수가 없다. 자신을 따라 다니는 스토커가 미모의 소유자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 상대 남자는 그것을 스토킹이라는 범죄가 아니라 연애의 차원으로 승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아는 여자>의 귀여운 스토커 이연은 현재 누군가를 짝사랑 중인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캐릭터가 아니다. (“안돼. 나는 이나영이 아니잖아.”) 또한 이연은 현재 누군가의 짝사랑을 받고 있는 남성들로 하여금 그 말없는 사랑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만드는 캐릭터도 아니다. (“짜증나. 이나영 같은 애는 다 어디 간 거야”)

하긴 애초부터 영화의 관심은 ‘아는 여자’ 가 되고 싶어 몸부림치는 ‘모르는 여자들’을 위로하는 데 있지 않았다. 차마 다가서지도 못하고 포기하지도 못하는, 은밀하고 음험한 집착의 욕망을 탐구할 생각도 없었다. 이것은 성인 남자를 위한 환타지다. 왕년에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날렸으나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선 ‘2군’ 인, 별 볼일 없는 남자. 맘대로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 팍팍한 인생에게도 실은 언제나 말없이 숨어서 응원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 꾸밈없고 순결한 그 천사의 이름이 아무려면 스토커일 리가. 이나영을 닮은 그 여자의 이름을, 오 마이 갓, 솔직히 ‘희망’ 이라고 지어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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