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 영화사 출신 괴물들의 총집합! 드라큘라와 그의 천적 반 헬싱,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이 한자리에 모였다. 게다가 ‘드라큘라의 신부’(그녀들은 영국 해머영화사 출신이다)와 드라큘라의 자식(피그미 박쥐),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파라마운트 출신)까지 막강 조연으로 활약한다. 최근 몇년 사이 <젠틀맨 리그>와 <언더월드>(혹은 <프레디 vs 제이슨>도 여기 포함될 수 있다면) 등 각자의 영역 구분이 확실했던 슈퍼히어로 내지는 괴물들의 혼종결합을 시도했던 영화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와중에 <반 헬싱>은 동급최강으로 기록될 만하다. 시원시원한 사이즈와 스피드, 비주얼 면으로는 한여름의 더위를 잊기 위한 롤러코스터로서 손색없는 이 영화는, 러닝타임 2시간 동안 쉴새없이 각 괴물들끼리의 싸움이 시한폭탄처럼 장전해 있다가 차례차례 폭발하며 보는 이의 아드레날린을 촉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미이라> 시리즈로(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캐릭터로만 영화를 꾸민 <스콜피온 킹>까지) 유니버설의 1959년작 <미이라>를 리메이크한 전력이 있는 스티븐 소머즈에게 있어 원칙은 단 하나, 일단 익숙한 주인공들을 끌어모은 다음 참신한 시각이나 해석을 부여하는 ‘위험한 시도’를 벌이기보다는 그 익숙함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대신 액션과 스타일을 빵빵하게 키워주는 기계적인 업그레이드의 놀라운 추진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숨 돌릴 새 없는 액션신의 열거, 실제 서커스 단원들이 열연하는 가장무도회의 장엄하고 스펙터클한 아름다움, 노트르담 성당이나 드라큘라의 성,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실험실, 발레리우스가의 성 등의 엄청난 세트디자인…. 영화는 마치 장대한 세밀화의 터치로 그려진 그래픽 노블을 읽듯 한장한장 넘길 때마다 끊임없는 볼거리와 흥밋거리를 충실하게 던져준다. 다시 말해 그 업그레이드의 분량을 따라가기만 하더라도 관객은 ‘포만’ 상태에 처해버리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지치지 않고 영화를 따라갈 수 있는 힘은 무엇보다 캐릭터에서 나와야 한다. 수십년 동안 꾸준하게 리메이크돼왔던 유명 캐릭터들이 총집합되었을 때, 그에게 어떤 감정 이입이나 매혹의 요소가 새롭게 재발견되어야만 애정을 갖고 끈기있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주요 인간-괴물 캐릭터들은 그저 거대한 시뮬레이션 게임 속의 주인공들처럼(특히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라) 멋지고 화려하고 스타일리시한 액션장면 속 하나의 등장인물일 뿐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어떤 필연성도 부여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객 역시 별다른 절박감 없이 조종대를 쥐고 있는 게으른 게임 유저의 기분으로 영화를 방치하게 된다.
<엑스맨>에서 ‘늑대 남자’의 영향을 받은 울버린 역을 맡았던 휴 잭맨이 또 다른 늑대의 이미지를 간직한 근사한 남자 반 헬싱 역으로 열연하고 있지만, 거기까지가 끝이다. 케이트 베킨세일의 안나 공주 역은 우스꽝스럽다. 그녀는 ‘영화 끝까지 남자주인공과 대등하게 액션을 펼치는 여주인공’ 역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했지만 안나 공주가 영화 속에서 하는 일이라곤 혀 짧은 목소리로 구사하는 슬라브식 영어 대사와(이 영화에서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반 헬싱밖에 없다니! 반 헬싱 역시 엄밀하게 따지자면 영어권 인물이 아니므로 슬라브식 악센트를 사용해야 한다. 주인공만 ‘표준’영어, 나머지 타자들은 죄다 외국 악센트로 구분되는 방식도 이젠 지나치게 진부하다), 하이힐 부츠를 신고 어색하게 뒤뚱뒤뚱 달리고 점프하기밖에 없다. 아무런 매혹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녀가 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에도 별다른 연민을 품을 수 없다는 건, <반 헬싱>처럼 선명하게 관객의 감정을 휘어잡아야 할 엔터테이닝 무비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아닌가.
:: 반 헬싱의 모델들과 영화 속 반 헬싱
드라큘라 백작의 영원한 천적
이제는 뱀파이어 헌터, 라고 말하면 사라 미셸 겔러의 버피부터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피 이전에 이미 1897년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에서 처음 등장하여 수많은 패러디와 후속작에서 꾸준히 활약했던 반 헬싱이야말로 뱀파이어 헌터의 원조라 주장해야 한다.
유명한 과학자이며 철학자이자 집요한 뱀파이어 헌터, 드라큘라 백작의 영원한 천적. 반 헬싱은 ‘강철 같은 담력과 얼음장 같은 기질, 불굴의 결단력을 지니고 이으며 스스로를 잘 제어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스티븐 소머즈의 영화에선 가브리엘 반 헬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소설 속 본명은 아브라함 반 헬싱이다. 반 헬싱의 원 모델을 추측하는 여러 가지 가설 중에서 브람 스토커 자신이 반 헬싱과 동일시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 까닭은, ‘브람’ 스토커의 이름 자체가 아브라함의 축약형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로는 19세기 말에 나온 셰리단 르 파누의 유명한 뱀파이어 소설 <카밀라>(1872)의 닥터 헤셀리우스로부터 왔다는 것, 혹은 스토커 자신이 <드라큘라>를 쓰면서 주로 참고했던 T. J. 페티그루의 1844년작 <약과 수술의 역사와 본질에 관한 미신들>에서 짧게 언급되는 연금술사로부터 왔다는 설도 있다. 가장 신빙성 있는 가설로는 스토커와 동시대에 살았던 독일인 교수 막스 뮐러가 있다. 그는 종교와 신화의 전문가였으며, 스토커의 초기작에서도 막스 빈쉐펠이라는 ‘독일인 역사학자’로 등장한 바 있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최근 영화 속 반 헬싱으로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1992)에서 반 헬싱으로 분했던 앤서니 홉킨스가 있다. 탐미적으로 죽음을 승화하는 일종의 ‘예술가’로서의 드라큘라에 맞서는 지성적이고 건조한 관념론자의 이미지. 그러나 영화사적으로는 무엇보다 피터 커싱의 반 헬싱이 가장 강력한 아이콘이 아닐까? 그는 크리스토퍼 리가 드라큘라로 분한 <드라큘라의 공포>(1958)에서부터 <드라큘라의 신부>(1960) 등 총 5번에 걸쳐 반 헬싱을 연기했다. 피터 커싱은 용감한 지성인으로서의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육체적으로도 드라큘라와 기꺼이 대립했다. 드라큘라와 맨손으로 맞붙거나 드라큘라에게 물린 상처를 없애기 위해 자신의 목을 다리미로 지지는 것까지 감수할 정도의 ‘육체적’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