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브러더스 회고전으로 부천을 찾은 <철수무정> <자마> 배우 강대위
제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쇼브러더스 회고전을 마련했다. <철수무정> <자마> <대자객> <유성호접검> <스잔나> <성성왕> 등 6편의 영화를 풀어보인 부천은,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된 과거의 이야기를 몸소 들려줄 손님으로 배우 강대위(<철수무정>(1969), <자마>(1973))를 초청했다. 홍콩 무협영화의 최고 스타 왕우의 시기가 저문 뒤, 장철 감독의 <복수>(1970)에 출연하면서 배우 적룡과 함께 쇼브러더스사의 70년대를 책임졌던 또 한명의 스타. 바르게 생긴 왕우와 적룡이 외모의 진지함이 과해 웃는다는 것 자체가 꽤나 어색했던 사람들이라면, 강대위는 유연하고 영리한 2인자로서 좀더 풍부한 표정을 보여준 캐릭터였다. 약 80여편의 출연작 가운데 35편 정도를 장철과 함께했던 그는, 감독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간명하게 표해 보이곤 했다. 수십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은 그 단호함의 한편엔, 과거의 빛을 잊어버리고 간결한 삶에 적응해간 사람의 무덤덤한 태도도 함께하고 있었다.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난 소감을 말해달라.
행복했다. 그리고 매우 놀랐다. 우리 영화는 아주 옛날 영화들인데 그 영화를 좋아하는 젊은 팬들이 많더라. 아주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 옛날 영화들을 다 봤는지 궁금했다. 아마 비디오나 DVD로 봤던 것 같다. 그들은 영화 속의 캐릭터들이 영웅답다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웃음)
스턴트맨을 하다가 배우가 됐다던데.
스턴트맨을 하기 전에도 영화에 출연했다. 부모님뿐 아니라 형제들까지 우리 집안이 모두 영화쪽에서 일해오던 사람들이라 나도 4살 때부터 간간이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다 16살쯤 스턴트맨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영화 연기에 필요한 것들을 배워오다가 장철 감독님을 만나 <사각>을 찍은 게 19살인가 20살 때다.
스턴트맨을 하는 동안 정식으로 배우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나.
연기자가 되려고 스턴트맨을 한 건 아니었다. 장철 감독님에게 발탁된 뒤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를 계속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장철 감독과 작업을 많이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내가 영화를 80여편을 찍었는데 그중 35편 정도를 장철 감독과 찍었다. 장철은 감독이기 이전에 나에게 스승이고 사부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스승이자 사부라는 건 어떤 의미로 한 말인가.
스승이라서 스승이라고 부른 것뿐이다. 여기에 다른 말이 더 필요한가? 물론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장철 감독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이었나.
굉장히 남성적인 걸 추구했던 사람이고, 영화도 남성적으로 찍었다. 이전까지 여성적인 느낌이 강했던 홍콩 무협영화도 그 사람 이후로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피가 많이 등장하고 잔인했다는 점엔 동의하지 않는다. 장철 감독은 사람이 죽는 장면을 묘사할 때 리얼리티를 중시했을 뿐이다. 그 사람의 영화는 항상 진(眞), 선(善), 미(美)를 찍었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늘 선하고 올바른 것과 아름다운 것을 찍으려고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것(好)을 찍었다. 이런 것들이 장철 감독 영화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장철 감독과 작업한 편수가 많아지면서, 초기엔 어려웠을지라도 후기로 갈수록 캐릭터나 스토리텔링에 관해 본인이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을 것 같다.
캐릭터를 맡기 전에는 충분히 상의를 했지만 현장에서 감독에게 이견을 제시한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사적인 장소에서 살짝 이야기하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어도, 영화를 찍는 현장에서는 절대로 감독에게 이견을 말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사적인 자리에서는 어느 정도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는지.
나는 장철 감독에 대해 이견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반대 의견이라는 건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모든 결정은 감독이 내렸다. 장철 감독이 특별히 엄격하거나 무서운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제자로서 스승을 존중했던 것이고, 그 관계를 떠나서는 좋은 친구 사이였다. 장철 감독이 편애를 했다면 그 대상은 나였다. 물론 다른 배우들에게도 잘해줬지만 나를 대할 땐 남들과 좀 달랐다. 이 점은 당시 영화들을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쇼브러더스의 최고 스타 자리는 한동안 왕우가 누렸다. 그러다가 적룡과 형제로 등장한 영화 <복수>를 찍으면서 당신도 본격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됐다. 그 영화의 특별한 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형제애가 가장 부각된 영화였고, 감독의 연출 방법도 새로웠다고 생각한다. 칼이나 다른 무기들 외에도 이 영화에서는 맨주먹을 썼다. 이 영화가 나온 뒤 마치 유행처럼 비슷한 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졌을 정도로 당시로선 유명한 영화였다.
적룡과 함께 출연한 적이 많았다. 둘이 함께 나오면 주로 적룡은 손윗사람을 맡았고 당신은 그의 동생뻘로 등장했다.
나이도 한살 정도 많긴 하지만, 적룡이 외모로 봤을 때 나보다 성숙하고 건장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왜소하고 개구쟁이 같은 이미지가 강했다. 장철 감독이 이를 파악하고 캐릭터를 맡겼던 것 같다.
지난해 부천을 방문한 정패패는, 호금전 감독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그 감독은 단지 자신에게 무협영화의 여주인공 역할을 맡긴 게 아니라 여협객다운 마음가짐과 정신자세까지도 일러주곤 했었다고 말했다. 장철과 본인과의 관계는 어떠했나.
우리는 그런 식의 얘긴 없었다. 역할이 협객이라고 해도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과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연기를 위해 자연스러움을 중시한 점은 있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내가 맡을 협객이 어떤 종류다, 라는 게 정해지고 나면 거기에 걸맞은 자연스러움을 내려고 노력했었다.
어떤 종류가 있었다는 건지.
크게 네 가지가 있는데, 우선은 어떤 일에든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협객이고, 두 번째로는 매사에 무관심한 협객, 세 번째는 역시 무관심하긴 하나 정의를 위해서는 칼을 들고 싸우는 협객, 네 번째는 첫 번째 유형과 비슷한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일에 맞서 싸우는 협객이다. 그렇지만 이 네 가지 말고도 종류는 훨씬 많다.
본인의 생각인가.
감독님이 갖고 있었던 유형이다. 그리고 감독님은 이 유형에 따라 배우들에게 역할을 정해주셨다.
본인에게 가장 맘에 와닿았던 타입은 어떤 건가.
두 번째 유형이다. 나한테 가장 잘 맞았고 가장 많이 하기도 했었다. 쉽게 말해 쿨한 협객이다.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사람들이 말하는 이미지였다. 한자로는 양자(良子)라고 표현한다.
본인의 최고작을 꼽는다면.
<신독비도> 〈13인의 무사> 그리고 <복수>다. 이유는 내 역할과 연기가 맘에 들기 때문이다.
<와호장룡>이나 <영웅> 같은, 최근의 무협영화들을 봤는지.
봤다. 둘 다 아주 좋진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영웅>보다는 <와호장룡>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와호장룡>은 간결하고 명료하면서도 화면이 아름다운 영화다. 양자경의 무술도 인상적이었다. 반면에 <영웅>은 과장이 너무 심하다. 화면도 그렇지만 액션이 매우 비현실적이다. 특히 장만옥과 양조위의 무술은 굉장히 비현실적일 뿐더러 아주 이상하게 보였다. 다른 영화들에서 짜깁기했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들도 많았다. 열심히 노력한 것은 보이지만 독창성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92년에 캐나다로 이민간 뒤, 영화나 TV드라마를 찍을 일이 있을 때마다 홍콩이나 중국에 왔다갔다 하고 있다. 지금은 베이징에서 홍콩방송사가 제작하는 TV드라마를 찍고 있다.
홍콩의 무협영화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라는 사실이 지금도 자부심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내가 활발히 활동했던 시대는 이미 마감했고, 지금은 예전만 못하다. 그렇게 큰 자부심까지는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이 늙어서까지 젊음을 간직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얻었던 한 시대의 인기도 영원할 수 없다. 이곳의 젊은 팬들이 젊은 시절의 나를 기억해준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처럼 가까운 곳에서 나를 인정해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더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