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냉정과 열정사이, <거미숲> <알포인트>의 감우성
2004-08-12
글 : 박혜명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그는, “할 말이 별로 없는데 어떡하죠”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어둡고 자의식 강한 송일곤 감독의 스릴러 <거미숲>과 배트남전을 배경 삼아 전쟁이 건드린 악몽을 공포로 그려낸 호러영화 <알포인트> 두 편을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게 된 배우가 왜 할 말이 없다는 걸까. 믿지도 않았지만, 한 귀로 흘렸다. 기자들에게 인터뷰 당사자의 저런 말들은 충격도 감동도 못 되는 법이다.

감우성이 사는 원칙 = 한쪽 발만 담그기

하지만 감우성을 잘 알았다면, 그 말이 정말이라는 것도 깨달았을 것이다. ‘할 말’은 곧 ‘영화에 대해 홍보성으로 해줄 좋은 말’이 없다는 의미였다. 기억상실과 조작이라는 까다로운 소재가 플래시백과 환상이라는 영화적 장치에 얽혀 대중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된 영화. 예상보다 쉽지 않은 캄보디아 로케이션 촬영이 여러 난항에 부딪히면서 기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나고 보충 촬영도 많았던 영화. 이 두 작업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그는 다양한 표현에 일관된 어감을 담아 말했다. “준비물이 있어도 활용을 못할 수 있고, 훌륭한 조건이 갖춰져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거죠.” 과대포장 않고, 먼저 영화를 겪은 사람으로서 관객에게 객관적이며 냉정한 소개를 해줘야 맞는 거라고 했다. 어차피 관객의 평가도 냉정한 법이니까. 세간의 매몰찬 평가에 위축될 필요도 없지만, 결과가 좋아도 들뜰 일도 아니었다. 그건 분명히 자신의 능력 이외의 것들이 작용한 것일 테니까. 감우성이 사는 원칙은 아주 심플했다. “한쪽 발만 들여놓는 거예요.”

“한 쪽 발만 들여놓는 거예요” “냉정”이란 말을 감우성은 적어도 스무번 이상 반복했다. 다양하고 알맞은 어휘 구사에 꽤 신경을 쓰는 사람 같은데, 이 두 가지 말만큼은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도 자신은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치열한 삶을 가능케 해주는 열정과, 그 열정에만 바보같이 휘둘리지 않으려는 이성을 항상 1:1의 황금 비율로 유지하고 싶은 사람. 이런 바램 자체가 이성적으로 느껴지는 그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기보다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주입시키는데 몰두했다. “냉정을 유지하는 방법은 관객의 관점에서 작업을 분석하는 거예요. 그래야 제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거든요. 영화 안의 상황에 빠져서도 판단하지만, 영화 밖의 상황에서 내가 처한 현실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두 발 다 담가서 거기에 휩쓸리거나 내 의식이 중독되면 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져요. 판단력도 흐려지고.” 일은 일, 일상은 일상임을 철저히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그는, 얼마 전 이사한 양수리의 새 집에 다섯 평 남짓 되는 텃밭을 가꾼다고 했다. “상추, 깻잎, 고구마, 옥수수, 가지, 치커리, 방울토마토, 포도, 그리고 이름 모르는 채소도 있고, 또…. 하여간 열다섯 가지 정도는 돼요. 앵두, 매실, 대나무 잎으로 술도 담가놨고. 제가 동경하던 생활이에요. 일을 할 땐 치열하게 하고, 일상은 또 완전히 평범하게 살고. 한 쪽 발만 들여놓으…(이하 생략)”

‘한쪽 발’에서 화제를 좀 돌려보려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 <현정아 사랑해>라고 하는 벌써 오래된 듯 느껴지는 소재를 꺼냈다. 부드러운 제스처와 다 이해한다는 눈빛과 백 마디 감언을 대신하는 잔잔한 웃음이 마치 모두 진짜 자기 모습인양 감쪽같았던 연기의 매력을 되짚었더니, 그는 바로 반응했다. “이미지라는 건, 내가 유도를 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이미지를 사람들이 더 바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요. 또 그걸 더 바라는 사람들은 나에게서 딱 그것만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장기적인 계획이란 측면에서 봐야 될 것이지, 내 스스로가 연기에 익숙해져버리면 그게 기술적으로 그럴듯해 보일지는 몰라도 내 자신에겐 솔직하지 못한 모습이 어느 순간 나올 수도 있고, 또 그게 내 능력의 바닥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연기라는 게 디테일의 싸움이거든요. 배우는 반복적인 걸 찍어내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가진 감성을 늘 자극해가면서 현장이 요구하는 대로 맞춰갈 수 있어야죠. 그런데 매너리즘에 빠져 있으면 절대 관객들의 눈높이를 넘어설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항상 한쪽 발…(이하 생략)”

강력한 대원칙을 세워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 자체에 관한 것이건, 인생을 사는 방식에 관한 것이건. 그들은 그 원칙을 가보처럼 붙들고 삶의 나머지 디테일들을 설계한다. 정말이지 ‘한쪽 발’ 말고는 할 얘기가 별로 없는 게 분명한 감우성의 디테일은, 치열하고 꼼꼼한 고집 같은 것이다. <거미숲>의 별장 살해 장면은 영화 구성의 강약과 내용 이해를 고려한 차원에서 감독을 설득해 결국 찍어냈고, 주인공 강민이 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할 땐 시각적 효과를 노려 머리를 반만 밀어내자고 스스로 제안했다. 육체적으로 모두가 힘들었던 <알포인트> 때, 간 수치가 정상의 300배를 치솟고 쓸개가 부어 위를 밀어낼 지경에 이르렀던 그는 죽기 직전 상황이 되어서야 한국에서 잠시 치료를 받고 왔다. 정상 수치는 되찾았지만 간기능은 예전 같지 않다는 감우성은, 배우의 고생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정말 당연한 얘기에다 “쉽게 해서는 발전도 없고, 감당할 수 있는 한도에서 관객들에게 더 폭넓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라는 자기 몫의 디테일을 덧붙였다. “좋은 척, 편한 척 일하고 싶진 않아요. 사람들끼리 하는 작업이 100% 호흡이 맞을 수도 없는 거고, 일단 영화를 할 때는, 싸울 건 싸우고 부딪칠 건 부딪치면서 치열하게 할 건 하는 거죠. 그러면서도 한쪽 발은…(이하, 생략)”

의상 협찬 크리스찬 라크르와 옴므, ELOQ, 아디다스, 레베카 스타일리스트 류경숙 / 메이크업과 소품 이정민, 정민숙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