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4일 오후 6시30분, 정은임 아나운서는 여의도 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서른여섯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지난 7월22일 낮 2시40분, 동작구 흑석동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지 14일 3시간50분 뒤의 일이다.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정은임 아나운서의 쾌유를 비는 글이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차고 넘칠 만큼 쏟아졌고, 개인 홈페이지에서 환자의 뜻과 상관없이 발췌한 사진과 글로 “사고를 예측했다”는 식의 어이없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다음카페의 ‘정은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쾌유를 비는 촛불집회를 계획했다가, 지나친 언론의 관심으로 취소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정은임 아나운서는 처음 응급실에 실려올 때만 해도 “30분을 넘기기 힘들다”는 진단과 달리 하루에서, 닷새로, 그렇게 열흘이 넘도록 “누구보다 강한 의지”로 버텨내고 있었다. 중환자실 병동에 누워 있는 그는 힘겹게, 그러나 성실하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세상과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몇달, 아니 몇년이 걸릴지라도 <그녀에게>의 알리시아처럼 수천 수만 베니그노의 간절한 속삭임을 듣고 다시 아무일 없었다는 듯 눈을 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말걸기’는 더이상 불가의 일이 되어버렸다.
지난 4월,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이 봄개편과 함께 6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코미디의 주인공이 돼버렸어요”라며 못내 씁쓸해하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지막 녹음을 하던 날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처럼 빨간 코트를 입고 나타나 애써 밝게 인사하던 그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오프닝멘트로 나희덕 시인의 <서시>를 읽을 때만 해도 침착하던 목소리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끝내 울음으로 바뀌어버렸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새침하고 도도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알고보면 후덕하고 눈물도 많았던, 팬들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붙여준 ‘정든님’이란 별명을 가장 좋아했던 사람. 그렇게 정든님은 기어코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정은임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미니홈피에서는 ‘1촌’간이고,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보듬어안을 ‘아는 여자’이지만 그녀와 내가 나누었던 인연은 고작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의 작가로 일했던 얼마간과 종영 이후, 채 1년도 되지 못한 시간이 다다. 감히 그녀를 추억할 자격도, 추억할 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짧은 글도 참 쓰기가 싫었다. 이 별것 아닌 기억들까지 나 혼자만 이기적으로 꽁꽁 숨겨두고 싶었다. 하물며 이어지는 글을 써주신 분들은 오죽했을까? 그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 그에 대한 기억을 추억하고 곱씹는 과정이 아직은 너무나 아프고 괴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참 고맙고, 그래서 참 미안하다. 여기 영화와 음악을 통해 그와 소통했던 이들의 안타까운 기억과 추모를 덧붙인다.
글·정리 백은하/ 자유기고가 lucielife@naver.com 사진 이혜정 socopi@cine21.com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90년대 ‘정영음’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특유의 말투와 해박한 영화 이야기로 수많은 골수팬들을 생산해냈다. 올해 초 부활한 ‘정영음’에서도 ‘FM 씨네마떼크’를 진행했다.
리버 피닉스, 그리고 <아이다호> 혹은 <허공의 질주>, 정말 좋지 않아요, 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던 정은임씨와의 첫 만남을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1992년 그해 가을 나는 그녀의 영화음악실에 초대되었고, 그녀와 함께 영화에서 우리가 맛보았던 최고의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그렇게 우정을 나누었다. 나는 정말, 아직도, 그녀가 우리 곁에서 떠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냥, 여전히, 영화관에서 우연히 만나면, 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 좋지 않아요, 라고 말을 걸어올 거라고 믿을 생각이다. 그것이 내가, 정은임씨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영화의 이름으로,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화 친구, 정성일, 2004년 8월 당신 없이 시작한 그 첫날 씀.
작가 권영은 2003년 새롭게 시작했던 ‘정영음’의 음악작가로 일했다. 프로그램은 짧게 끝났지만 동갑내기 친구로서 우정은 개편의 영향력 밖의 일이었다.
그녀의 녹음시간은 유난히 길었다. 사연 하나하나도 빼놓지 않으려는 완벽주의자적인 꼼꼼함, 청취자를 향한 특별한 애정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넘쳐나는 눈물샘 때문이었다. 그녀는 청취자의 사연을 읽을 때마다 자주 목이 메었다. 청취자의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영화 다섯편을 소개하는 ‘내 일기장 속의 영화’라는 코너를 녹음할 때면, 한번에 간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녹음을 자주 끊어야 했다. 결국 화장실을 몇 차례 들락거리고 콧잔등이 시뻘게진 다음에야 쑥스러운 듯 이렇게 말하곤 했지. “너무 창피해. 난 왜 이렇게 눈물이 많지?” 그녀는 소문난 울보였다. 스스로 오버걸이라 자청할 정도로 감정의 수직선이 길고, 무엇이든 몸살을 앓을 정도로 깊이 빠져버리는 열정주의자였다. 좋아하는 책도, 시도, 그림도, 영화도 매 순간 순간 넘쳐나는 낙관주의자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과 평화를 꿈꾸는 몽상가였다. 하지만 삶이 지치고 힘들다는 청취자의 사연을 읽을 때면 늘 강건한 목소리로 이렇게 힘을 실어주곤 했다. “돌밭에 구를 날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연약함도, 강인함도, 꿈도, 열정도 숨기지 않았던 울보 아줌마… 그런 당신이, 벌써부터 참 그립습니다.
감독 박찬욱은 90년대 ‘정영음’에서는 독특한 취향을 가진 달변의 게스트로 유명했다. 젊은 시네필들이 영화적 에너지를 나누는 일은 ‘온에어’ 사인과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그 시절, 나는 데뷔작을 내긴 했지만 언제 영화를 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참 우울한 감독이었다. 글을 쓰거나 라디오 게스트로 소일하던 그때,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난 정은임씨는 좀 독특한 DJ였다. 보통 코너를 진행하는 방식이 나 혼자 떠드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대부분의 DJ들은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음 자기가 할 대본을 읽는다든지, 다른 것을 체크한다든지 게스트 이야기를 건성건성 듣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은임씨는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재밌어하고, 즐기면서 꼼꼼히 귀기울여 들어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경청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밥벌이 상대가 아니라 진지한 대화상대를 만난 것 같은 느낌,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랫동안 문을 닫았던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의 스튜디오 문을 <올드보이> 때문에 다시 열고 들어갔다. 유난히 반가워하며 정은임씨는 웃고 있었다. 감독과 DJ로서의 첫만남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될는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홍동식 PD(현 MBC 라디오 편성부장)는 92년부터 95년까지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을 연출했다. DJ와 PD 관계를 떠나, 영화적 솔메이트로 2년6개월 동안 잊을 수 없는 프로그램 하나를 세상에 내놓았다.
어떤 영화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나이답지 않게 명화극장류의 흑백 올드무비를 얘기하며 초롱초롱 빛나던 그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92년 초가을이었지 아마. 나는 입사 9년차의 혈기왕성하고도 어딘가 삐딱한 PD였고, 그는 입사 1년이 채 안 된 풋풋하고도 어딘가 비밀스런 데가 있는 아나운서였다. 영화음악 MC를 고르려고 당시 신입 아나운서였던 그를 오디션했었지. 그 자리에서 그와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 무슨 얘기였더라?… 그래, 맞아. 영화, 철학, 문학, 정치, 역사, 고고미술(그의 전공이었던…), 가족, 사랑, 인생…. 그리고 어릴 적 커서 식모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은밀하게 고백했었지. 자기 집의 식모 언니처럼,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마음대로 라디오를 듣고, 유행가를 부르고, 맛있는 음식을 해먹고…. 아마 어릴 적 집안 분위기가 엄해서 그런 발칙한 일탈을 꿈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눈망울에서 세상에 대한 자유의지를 읽었다. 말하자면 그때 그의 야무진 지적 능력과 똘똘한 외관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필시 그를 MC로 기용하고야 말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왜냐면 영화에 대한 그의 순수라든지, 세상을 보는 그의 시각이 나의 그것과 요샛말로 코드가 비슷했기 때문이랄까?. 그리고 그와 나는 정말 많을 것을 쏟아부었다.
세상과 영화에 대한 열정, 분노, 사랑…. 쉽게 말해 나는 그를 통해, 영화와 연애를 하고, 세상과 연애를 했던 것이다. 아니 뒤집어 말해 나는 영화를 핑계대고 그와 연애를 했던 건지도 몰라. 그리고 2년6개월 나는 바닥까지 탕진했고, 그는 이제 시작이었다. 오히려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의 품을 떠나면서, 그는 껍질을 벗고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던 거지. 결혼하고, 휴직해서 유학을 떠나고, 아들을 낳고, 회사에 복귀하고, 노조 일을 하고….
심지어 다시 영화음악 MC로 복귀하기까지 했지. 그래 그가 저지른 가장 어정쩡한 실수는 다시 영화음악 MC로 복귀한 거였어. 내가 그때 그랬다.
2005년 봄이면 영화음악을 떠난 지 꼭 10년이고, 그때에 맞춰 그때 그 PD와 그 MC가 10년 만에 복귀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섭섭하다. 조금만 더 기다리지…. 그러나 사실은 질투였다. 날 빼놓고 다시 영화와 연애질을 시작한 것에 대한…. 그래, 이제 그는 없다. 오즈 야스지로와 타르코프스키와 성일과 찬욱과 피닉스와 영희와 문영과 상무와 같이 했던 기억들도 이제 추억으로 남았다. 그가 어찌어찌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개하고, 조합 일 열심히 한 투사로 이미지화되어 미디어에 도배되고 있지만 내게 그는 그저 영화를 좋아한 소녀일 뿐이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소년이었고….“언제였던가… 영화를 좋아하는 소년, 영화를 좋아하는 소녀를 만났었지.” 그래, 그의 영전에 던지고 싶은 말은 바로 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