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사랑은 지워지지 않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경남 촬영현장
2004-08-16
글 : 김도훈
사진 : 오계옥

경남 합천의 어느 산 중턱.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7시간여를 달려 산자락에 도착했더니 거기서부터는 포장되지 않은 산길이 덜컹덜컹 시작된다. 한참을 더 올라갔더니 별안간 펼쳐지는 널다란 평원에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시원한 바람을 기대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콧구멍과 목구멍으로 확 쏟아져 넘어오는 열기. 아찔한 태양열이 여과없이 쏟아지는 산 중턱에서 정우성은 연신 무거운 해머를 휘두르며 말뚝을 박고 있는 중이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건망증이 많은 여자 수진(손예진)과 건축사의 꿈을 꾸고 있는 목수 철수(정우성)가 만들어가는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수진의 건망증은 그저 아파트 열쇠를 대문에다 그냥 꽂아놓고 나오는 아줌마들의 건망증이 아니다. 알츠하이머, 그러니까 ‘치매’에 걸린 수진은 지우개로 지우듯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가고, 마침내 자신이 사랑하는 철수마저 낯선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자를 향한 남자의 아픈 사랑은 그때부터 진심으로 시작된다.

이날의 촬영분은 철수가 건물 시공을 위한 첫 말뚝을 땅에 내리박는 장면이었다. 스타일리시한 양복을 입고 땅속 깊이 말뚝을 박아넣는 정우성은, 여러번 계속되는 촬영에도 지친 표정을 짓지 않는다. 언제나 좀 외롭고 반항적인 역할들만 맡아오던 그로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정통 멜로영화다. “멜로영화를 늘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내가 늘 찾아 헤매던 바로 그런 멜로라는 느낌이 들었다. 비극적인 소재이지만 희망적인 결말을 가진 그런 멜로 말이다.” 그런 정우성을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손예진이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 임하는 마음가짐도 새롭긴 마찬가지다. “아프고 죽는 게 지겹지도 않냐고? 주위에서 다들 ‘또 죽어? 또 아파?’라고들 하지만, 어차피 병명도 다 다르고(웃음), 젊은 나이에 치매라는 게 독특하기도 한데다 몸이 아닌 정신이 아픈 병이라는 것도 끌렸다. 그리고 결혼에 이르는 성숙한 사랑이라는 점도 좋았고.” 여름 향기나는 ‘소녀’에서 기억의 조각들을 부수어가는 ‘여자’로 익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컷 런스 딥>으로 알려진 이재한 감독은 “머릿속 기억이 지워져가는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내 머리속 지우개>를 정의한다. 왠지 눈물짜는 사랑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만 같아 넌지시 물어보았더니 “억지로 질질 짜고 그런 거 없다. 드라이하고 현실적이면서 유머가 빠져 있지는 않은 비극을 만들고 싶다. 환희와 절망이 함께 공존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라고 조목조목 이야기를 내놓았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현재 80% 정도의 촬영을 마친 상태이며 8월 초에 크랭크업해 11월5일에 개봉할 예정이다. 그때가 되면, 머릿속을 지워나가는 여자와 그런 여자의 추억을 움켜잡기 위해 애쓰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조용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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