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스스로 주인공임을 아는 배우, <시실리 2km>의 임창정
2004-08-19
글 : 박혜명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기자시사가 아닌 일반시사에서 영화 <시실리 2km>를 봤다고 말을 건네자, 임창정은 “아, 18분 잘라낸 걸로 보셨네요”라고 했다. 본인이 직접 자른 것처럼 말하는 품새를 보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편집실에 갔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자존심은 세 보여도 주변을 다 휘어잡고 싶어하는 기운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그는, 사실 편집에만 관여한 게 아니었다. 조폭 무리와 마을 사람들과 처녀(라기보다 실은 소녀에 가까운)귀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장르 규정이 어렵지만 임의로) 호러와 코미디의 조합물 <시실리 2km>는, 알고보니 그가 각색과 편집과 제작에까지 공을 들인 영화였다.

공부하는 심정으로 영화의 모든 과정을 배우다

가수를 은퇴한 대신 여유를 벌어들인 임창정은, 배우로서 그리고 공동제작자로서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철저히 함께했다고 했다. 자신을 위해 쓰여진 시나리오를 한맥영화 김형준 대표에게 받아서 절친한 동생이자 뮤직비디오 출신의 신인감독 신정원에게 건넸고, “우리가 감수성이 비슷하니 같이 해보자”고 그를 설득해 촬영감독과 셋이 호텔에 틀어박혀 각색을 했다. “공부한다”는 심정으로, 부끄럽지만 공동제작자라는 크레딧을 올리고 투자유치 과정과 프로덕션 과정을 꼼꼼히 배워나갔다. 최종 편집본에서 감독과 함께 18분을 잘라냈건만 “감독은 역시 감독”이었던지 자신 몰래 6분을 도로 붙여놓았다며 신정원 감독에게 이해 섞인 서운함을 짚고 넘어간 임창정은, 예전 같았음 TV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시간까지 쏟아부은 이 영화를 너무나 사랑스러워했다. <색즉시공>과 <위대한 유산>을 통해 ‘감독과 배우가 하나가 되는 작업’의 의미를 알아왔던 그는 “영화가 감독만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더욱 굳게 믿게 됐다.

이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가보다. 배우가 브랜드 가치가 특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 장르인 코미디영화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유독 임창정의 출연작들은 임창정에게만 어울리는 디테일들로 가득하다. <시실리 2km>도 마찬가지다. 공중전화를 좀 쓰게 해달라고 임창정이 불쌍히 간청할 때 처녀귀신(임은경)이 아주 뚱하게 “그 전화, 안 되던데”라고 대꾸하는 상황은 전형적인 임창정식 코미디 호흡이다. 처녀귀신 역의 임은경과 단둘이 벌이는 일들은 특히 임창정의 아이디어로 완성된 부분이 많다. 그는 임은경의 대사를 그 자리에서 직접 떠오른 생각들로 대체하거나 새로 집어넣었고, 심지어 “나만 따라해”라며 카메라 뒤에서 시연을 보이기도 했다. ‘저 대목에서 뭔가로 웃음을 자아낼 거야’라는 기대를 저버리기 위해 상대방의 대사와 액션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자신이 코미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자체의 리얼함이 웃음을 유발하는 거라는 그의 말은 사실 자신이 출연한 코미디영화를 설명하는 대부분의 배우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고정 대사나 다름없다. 임창정이 말하는 ‘상황의 리얼리티’란, 자신의 순발력과 적극성과 아이디어를 자기 역할에 한정하지 않고 자기가 속한 영화 속 상황 전체로 퍼뜨리는 ‘임창정의 리얼리티’로 받아들이는 편이 옳았다. 자신이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옷이 되도록,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현실이 되도록 임창정은 자기가 속한 장면의 호흡을 주도하는 배우다.

‘임창정의 영화’에 대한 강한 자신감

임창정은 “이번 영화가 다른 영화들에 비해 개성있는 조연들이 두드러지고 그분들의 역할이 크긴 해도,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은 이 영화가 임창정의 영화라고 기억해줄 것”이라 말했다. 스스로 주인공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는, 자기가 출연한 영화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길 꿈꾸는 사람 같았다. 한두번 들어서는 제목을 정확히 받아적기가 몹시 난해한 영화 <파 송송 계란 탁!>을 차기작으로 결정한 이유도 <위대한 유산>에서 공동작업의 기쁨을 알게 해줬던 오상훈 감독과의 재회란 점에 있다. “가수랑 배우를 같이 할 때는 계속 내 속에서 퍼다 쓰기만 하고 채워넣질 못하니까 어느 순간 고갈돼서 더이상 보여줄 게 없었어요. 내가 항상 잘하는 줄만 알았는데 바닥이 드러나니까 공황상태에 빠졌던 것 같아요. 이번 영화 하면서 해답을 얻었죠. 아, 한 가지만 하면 되는 거였구나.” 한 가지만 한다면, 그는 자기가 정말 잘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좀처럼 이미지 회복이 어려운 악역도 자긴 정말 잘해 보일 수 있고 거기서 돌아오는 것도 문제없다고,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숨김없이 말했다. 임창정은 스스로가 주인공이란 사실 외에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사람이었다. 가수를 포기한 것도, 프로덕션에 어설프게 관여하는 게 아니라 각색과 편집까지 감독과 함께하는 제작자가 되려는 것도, 모두 그 지식의 실천인 셈이다.

의상협찬 넥스팀, 잭 앤 질· / 스타일리스트 류진화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