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원이 돌아왔다. 문화개혁 시민연대와 시청자 운동에 떠밀려난 토크쇼의 제왕. 2003년 문화계 10대 사건에서 1위를 차지했던 연예계 비리 사건에도 연루되었던 그가 자신의 혐의를 온몸으로 부인하며 방송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의 손에는 <도마 안중근>이라는 무거운 느낌의 서사영화가 들려 있다. <조폭마누라> <긴급조치 19호> 〈4발가락>을 만들었던 그가 ‘안중근’이라는 묵직한 화두를 내놓은 것은 흥미롭고 동시에 생경하다. 심지어 이번에는 제작자에 그치지 않고 16년 만에 직접 메가폰도 잡았다. 한줄의 뉴스도 제공하지 않고 1월26일부터 3월13일까지 상하이에서 촬영한 그의 두 번째 연출작 <도마 안중근>은 8월27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소스원프로덕션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약간 상기되어 보였다. 사진을 위한 포즈를 취하면서 “1년 만에 갑자기 하려니까 어색하네”라고 너스레를 떨던 그는 인터뷰를 위해 자신의 책상에 앉자 진지해졌다.
왜 <도마 안중근>인가.
7∼8년 전부터 기획했다. 내가 안중근 한다니까 사람들이 다 반대했다. ‘니가 그걸 왜 하냐. 너말고 할 사람 많은데’라고. 하얼빈, 대련, 여순까지 여행하며 안중근에 대한 10권의 책을 들고 나가서 아이템을 잡았다. 시나리오는 미국 가서 쓰고. 한국에 와서 유오성씨 만나고 스탭들 꾸렸다.
면죄부를 얻으려고 한다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쉽게 면죄부 운운하는데 면죄부 얻으려면 아침방송 나가서 아줌마들한테 수다떨면 금방 면죄부 얻는다. 대법원 사이트 가서 내 죄를 살펴봐라. 사건의 본질이 없다.
방송 복귀에 대한 의견이 제작 초기와는 달라졌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영화도 열심히 하지만 본질인 방송을 안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타의에 의해 그만뒀으니까. 아직까지 KBS나 모든 부분에 방송계약은 유효하고 계약기간이 남아 있다. 방송에 들어가면 인터넷의 애들 떠들거나 말거나 내 고정팬은 분명히 있다. 내가 연예계 복귀가 힘드니까 안중근을 들고 나온다고? 천만에. 안중근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거고. 현실에서 부딪치는 건 방송이다. 내 자리로 가서 정리하고 이후에 계속 할지 말지는 내 자유다. 자유 민주주의라면서.
<도마 안중근>에서 안중근의 어떤 면에 집중했나.
잘 알려진 요소는 배제하고 내 방식으로 뼈대를 잡았다. 안중근은 테러를 하려던 게 아니다. 숨어서 쏘고 쥐새끼처럼 안 나타나는 건 테러다. 오사마 빈 라덴도 마찬가지야. 나타나야지. 자동차 폭탄 터트리고 까만 복면 쓰고 그러면 테러라고. 안중근은 이토를 쏘고 태극기 흔들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소련말로 했다. 소련 애들한테도 경고한 거지. 니들도 쏠 수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히 밝히고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서 동양평화론을 펼쳤다. 마지막에 그는 이토가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라고 말했다. 신앙인 개인으로는 진짜 미안하다고. 그리고 이토 개인, 그의 가족, 옆에 총 맞은 놈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했다. 나는 그 화해와 용서의 15분을 그렸다. 그게 이 영화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그 전 1시간은 누구나 그릴 수 있지만 라스트 15분은 내 세계다. 덧붙이면 일본 사람들이 안중근뿐만 아니라 9살 먹은 안중근 아들도 독살했다.
<긴급조치 19호> 〈4발가락> 같은 예전 작품의 실패를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본인 생각은.
<조폭마누라>는 많이 벌었다.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궁금하다. 두편의 손해를 모두 만회할 만큼이었나.
여러 명이 나누긴 했지만 벌 만큼 벌었다. 〈4발가락>은 지방까지 80만명(서울관객 3만5187명, 〈2003한국영화연감> 참조)이 들어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이게 편견이다. 무조건 내가 하면 망했다고 매도한다. <긴급조치 19호>도 영화적으로 좋은 영화다. 한번 이야기해보자. 박정희 시대 독재 이야기를 요즘 영화에서 흔히 한다. <긴급조치 19호>는 시대를 풍자해서 미리 앞서갔어. 그런 영화를 코미디언이 만들었다고 무조건 코미디로만 취급한다. 반대로 말하면 그 작품은 한국 영화계에서 다시는 못 만들 프로젝트다. 다시 그 많은 사람이 모여서 작업하는 게 가능할까? 그럼 장점을 봐야지. 단점만 보지 말고. 서세원이 연예계 생활 30년 해서 그런 영화 못하라는 법이 함무라비 법전에라도 있나? 외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한류 시작되면서 그 영화가 DVD 인기 최고다. 거기 다 나오잖아. 그거 하나 가진 아이들이 중국에서는 최고야. 그럼 됐어. 한류에도 도움이 됐으니까. <긴급조치 19호>도 흥행 안 죽었어. 60만명(서울관객 4만1034명, <연감> 참조)으로 손익분기점 넘겼다.
그렇다면 착수해서 손해를 본 영화는 없다는 뜻인가.
다 털어서 보자.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평균을 내면 많이 벌었어. 그렇게 평가해야지. 영화적으로도 나는 외국 걸 베낀 적은 한번도 없어. 까놓고 이야기해보자. <태극기 휘날리며>? 당신들 만날 그러잖아.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흉내냈다고. <쉬리>? 홍콩영화. <투캅스>? <마이 뉴 파트너>라는 유럽영화. 당신들도 다 알잖아. 왜 그런 건 안 씹고 내가 영화만 내놓으면 뭐라고 하나. 내가 언뜻 아까 지나가는 말로 그랬어. 차라리 ‘돈텔마마’ 아니 <돈텔파파>가 최고다. 무슨 호러냐. <알포인트>고 뭐고. 그거 미국 놈들이 더 잘 만들어. 한국적인 게 최고야. <늑대의 유혹>이 최고. 그걸 누가 따라오겠어. <바람의 파이터>? 그냥 <옹박>이나 만들라고 해. 민족적인 감정이 있고 우리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한국영화 중에서 내가 제일로 치는 게 <미워도 다시 한번>. 그건 독재 속에서 영화가 나아갈 길을 찾았어. 멜로. “아빠 찾지 말아라.” (웃음) 얼마나 좋아? 그 작품이 내 인생의 최고작이다. 두 번째는 <뻐꾸기 둥지 몸으로 울었다>(<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와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를 혼동하여 나온 표현인 듯)의 정진우 감독. 그 시대 쿼터 따려면 어쩔 수 없어. 개성있는 작품이 좋아. 물론 모방이 창조를 하고 성공도 하지만. 그거는 깊은 내면의 만족은 없다 이거지. 망가져도 정소영, 정진우 감독은 그게 있을 거라는 거지.
최근 한국영화 중에는 맘에 드는 건 없는지, 있다면 어떤 작품인가.
최근에는 없다. 영화는 누구든 찍을 수 있고 만들 수 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뭐라 할 수 없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 나는 흉내내기 싫으니까 그렇게 안 하고 그쪽은 그렇게 가라 이거야. 그래야 발전을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나도 건들지 말라는 거야. 너희들 그렇게 가는 건 참견 안 하는데 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냐고.
코미디언, 방송인이라는 입장에서 영화제작이나 연출을 하는 가장 큰 어려움을 꼽는다면.
전 스탭들이고 배우고 일단 의심부터 하지. 치사하게. 편견이지. 유오성이 그러더라고. 첫날 촬영 끝나던 날.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다고, 형하고 작업을 하면서. 자기도 굉장히 반성하고 쉽게 생기는 편견을 버리기로 했다고.
영화제작자 혹은 영화감독으로서의 본인의 장·단점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어떤 게 있을까.
일단 아날로그 세대니까 제작비를 상당히 안 쓴다. 아날로그라서 없으면 대충 넘어간다. 아날로그는 그리고 콘티가 없다. 머릿속에 그림을 갖고 들어가지. 그래서 스탭들이 2회차까지는 헷갈려 한다. 한 3회차까지 가면 안다. 각자 콘티가 그려지지. 그러면 진행이 빨라진다. 아침에 회의 10분 하면 오늘 찍을 분량에 대해 딱 나오지. 그래서 이번에도 속도가 빨랐다. 28회차에 끝냈으니까. 그런 게 장점이고. 단점은 디테일이 아무래도 부족한데 그 부족한 디테일을 중국 세트나 소품으로 보완하고, 미술감독을 좋은 사람 만나서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중국 촬영시 어떤 중국 PD를 기용하는가가 관건이라고 하더라. 이번 프로젝트는 어떠했나.
직접 다 했지. 직접 다이렉트로 붙어서. 중국 애들 모르게 되게 늦게 찍는 척하면서 우리 찍을 분량을 다 찍고. 그러고 나왔지. 그러니까 중국처럼 음흉하게 찍었다.
시나리오 검열문제도 심각하다던데.
사실 부끄러운 게 우리나라보다도 중국이나 북한에서 안 의사를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 덕에 시나리오 검열도 쉽게 갔고 찍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금강산, 평양 시사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밝힌다면.
7월5일날 갔어야 하는데 조문단 파동으로 무산되었다. 우선 금강산에서 남북 공동시사회를 8월23일날 가질 예정이다.
애들은 별말 안 하는데 마누라는 반대했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는 내 성향이 김구 선생처럼 민족주의다. 좌우 치우치지 않고 우리끼리 잘살자. 미국 놈, 일본 놈, 북한 놈 다 나쁘고 우리끼리 잘살아보자. 나의 내면을 재판받고 싶다고 아내한테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연출이 따로 있었다고 알려졌었다. 어떤 사정이었나.
원래 투자만 하고 빠지려고 했다. 그러다가 다들 못하겠다고 해서 직접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만들기 전에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다. 하네 안 하네. 찍네 안 찍네. 왜 찍네. 하도 말들이 많아서 다른 사람 앞세우고 내가 찍어버렸다.
항간에 소문처럼 개인적인 재정 상황은 문제가 없는지 궁금하다.
없다. 살 집 있고. 애들 다 키워놨다. 여기서 더 망하면 집 팔아서 전세로 가지 뭐. 애들 시집 장가 보내면 되는 거고, 지들 알아서 취직할 텐데. 이제 대학생인데 아르바이트도 알아서 하겠지. 막말로 마누라랑 나는 농사지어도 되고, 이민 가서 불고기집을 해도 그만이다. 내 얘긴 그런 차원에서 두려움이 없다는 거다. 정 망가져도 통닭집이라도 해서 배달하고. 삼겹살집이라도 하고. 그래도 이름이 있으니 굶기야 하겠어.
배급이 엔터모드인데 주요 배급사와는 접촉하지 않았나.
왜 배급을 CJ나 시네마서비스가 독식하나. 배급회사가 30개는 있어야 돼. 좋은 영화가 있으면 너도 나도 배급할 수 있어야지. 주요 배급사와는 기분 나빠서 안 해. 어리거나 후배한테 가서 내 영화를 왜 부탁해. 쪽팔리게. 개인으로 따지면 인격이 나보다 나아, 돈이 더 많아. 인기가 더 많아. 길거리 다니면 누구를 더 많이 알아봐. 차라리 내가 배급하고 말지.
다음 작품 계획은, 있다면 어떤 내용인가.
바로 간다. 안시성의 양만춘 장군. 되도록이면 남북 합작으로 하고 싶다. 고구려 역사 세우기니까 북한도 참여해야지. 사실 <도마 안중근> 시사회는 둘째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것을 빌미로 접촉해서 꼭 안시성을 하고 싶다. 시나리오 작업이나 세트 부지 물색도 거의 끝나서 세 군데로 좁혀졌다. 그쪽도 협조적이다.
파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별 생각없다. 다만 김선일 사건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엔테베작전 같은 걸 펼치도록 왜 특공대를 보내지 않았을까. 왜 안 구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난 분명히 민족적인 성향이기 때문에 파병을 하고 안 하고는 별 생각이 없다. 돈 많이 준다면 해도 좋고, 이익이 없다면 안 해도 좋다. 김선일 사건은 파병이랑 상관없이 쳐들어갔어야 한다고 봐. 전쟁도 불사해야 했다고. 단호하게.
두 매체를 모두 거쳐본 입장에서 영화와 TV를 비교한다면.
TV야 자빠져서 보건 싸움질하다 보건 관계없다. 영화는 돈 내고 들어와서 정신차리고 보는 거니까. 집에서 아버지한테 삥쳐서 여자친구랑 약속하고 보는 거니까. 만드는 건 내 생각이나 아이디어만 있으면 찬스는 있다. 영화는 세탁소 하다가도 만들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다.
TV 스타였다가 충무로로 돌아온 경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것도 웃기는 이야기다. <머저리들의 긴 겨울>이라는 영화로 1978년 충무로에서 처음 시작했다. 그전에는 충무로 스탭이었다. 그리고 85년에 <납자루떼>를 했다. 따지고보면 내가 충무로 1세대다. 그런데 어느날 새로 애들이 나오더니 내가 충무로 사람이 아니고 반충무로래. 나 같은 놈이 안중근이라도 만들면 고맙게 생각해야지. 나 같으면 업고 다니겠다. 서세원이가 방송해서 돈벌어서 싸갖고 와서 이런 좋은 작품 했구나. 그러겠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서세원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는 내 고향이다. 스타트도 연출부로 영화에서 했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온 놈을 왜 자꾸 고향에 왔냐고 묻는 게 어딨냐고. 어느 날 보니 안성기는 국민배우고 나는 안티충무로더라. (옆에서 누군가가) 국민 개그맨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