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사랑할때 버려야할...>의 해리와 에리카
2004-08-20
글 : 정이현 (소설가)
주책스런 중늙은이와 신경질적인 이혼녀의 결합 그런데 왜 공포스럽지?
이것은 공포영화다!

해리는, 육십대 초반의 법적 총각이며 무수한 연애질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결혼한 적 없어 ‘미꾸라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에리카는, 부드러운 입술을 키스가 아니라 립스틱 바르고 휘파람 불 때나 사용하는 오십대 중 후반의 이혼녀다. 딸의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의 엄마라는 관계로 맞부딪치지만 이들은 곧 ‘애들 같은’ 사랑을 펼쳐 나간다. 사랑을 발견하고, 의심하고, 오해하고, 확인한다. 이 노친네들의 로맨스 여정에 기꺼이 동참하여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정상적인’ 다수 관객들의 옆자리에서, 공포에 질려 부르르 떨고 있는 소수의 ‘비정상인’이 보이는가? 그렇다. 그 소수 종족의 이름은, 바로 ‘독신남녀’다.

무엇이든 알려준다는 인터넷 지식검색 사이트에는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은 문답이 올라와 있다. ‘Q: 독신으로서 좋을 때는요? 그리고 서글퍼지거나 외로울 때는요?’ ‘A: 40살까지는 살만 합니다. 편하고 자유롭고. 하지만 마흔 넘으면 정말 남 보기도 초라해 보여요. 마흔까지만 독신을 권하고 싶네요.’ 아아, 이 대목에서 어찌 이 시대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몸소 실천하는 두 대표선수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으랴.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와 <어바웃 어 보이>의 윌 말이다. 윌과 캐리는, 해리와 에리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애인과의 잠자리를 위해 비아그라를 복용하고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주책 맞은 중늙은이 해리(잭 니콜슨)는, 아무 것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 관계기피증 환자 윌(휴 그랜트)의 25년 후 모습과 겹친다. 또 누구도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아 밤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원고나 쓰는 신세인 신경질적인 작가 에리카(다이안 키튼)는, 쿨하고 자유로운 뉴요커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가 상상하는 20년 뒤의 서글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성공한 사업가라 해도, 최고의 희곡작가라 해도, 해리와 에리카는 불완전한 인간이다. 쓰러졌을 때 간호해줄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운명의 짝과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은 공허하고 초라하다.

에리카는 자신에게 열렬히 구혼하는 청년의사(크헉, 그는 키아누 리브스다!!)를 버리고 ‘같이 늙어 가는’ 해리를 선택한다. 남들 눈에 비정상적으로 보일만한 ‘모험’ 대신 ‘안정’을 택하는 것이다. 이제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새로운 노땅 커플이 탄생하였고, 해리와 에리카의 노후는 안전하게 보장되었다. 해리와 에리카는, 윌과 캐리에게 충고한다. “얘들아, 그래봐야 별 수 없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란다.” 해리와 에리카 커플이 손자의 재롱에 흐뭇해하는 장면을 담은 영화의 에필로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섬뜩하고 서늘한 한 장의 가족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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