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미국 고등학교’라는 코끼리의 관전기, <엘리펀트>
2004-08-24
글 : 김도훈
컬럼바인 학살사건에 대한 구스 반 산트의 생물학적/미학적 해부도 그리기. 200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우리는 코끼리 한 마리를 거실에 둔 채로 살아간다. 밖으로 내보낼 방도가 없으니 그냥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지내다보니 어느샌가 코끼리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거실의 코끼리.’ 내부의 커다란 문제를 의미하는 서양의 우화다. 너무 거대한 내부의 문제들은, 손쓸 새도 없이 우리 삶의 무감각한 일부분이 되어버린다. 가끔은 코끼리가 몸을 움직여 집을 흔들기도 한다. 99년 미국의 컬럼바인 고등학교. 2명의 고등학생이 12명의 급우와 1명의 선생을 총살하고 자살했다. 코끼리가 움직인 순간이었다. 구스 반 산트는 바로 그 순간으로 숨어든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가진 존, 급우들의 사진을 찍는 일라이, 축구선수 네이던과 여자친구, 왕따 알렉스와 친구 에릭, 몸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미셸, ‘먹고 토하는’ 다이어트 중독증 치어리더들. 카메라는 아이들의 행보를 교차시키며 학교의 지형도를 관객에게 인지시키듯이 복도를 헤매고 다닌다. <엘리펀트>는 멋지게 조율된 관전기다. 깊숙이 잠입해 들여다본 ‘미국 고등학교’라는 계급사회는 하나의 세계처럼 닫혀 있고 완결되어 있다.

자.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조용한 기행의 끝에는 파국적인 결말이 도사리고 있다. 알렉스와 에릭은 총을 집어들고 “재미 좀 봐(Have Fun)”라고 무심하게 말하며 처형식을 거행한다. 하지만 정서적 충격을 각오한 관객의 기대와는 달리 학살의 장면들마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다. 전통적인 드라마트루기를 집어던진 구스 반 산트는 현미경으로 세포조직들의 전투를 들여다보는 관찰자처럼 멀리 물러나 있다. 영화 속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투영하려는 관객은 끊임없이 목을 죄어드는 듯한 갑갑함을 느끼게 될 테다. 최후의 비극을 보면서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알렉스와 에릭은 처형을 감행하기 전, 컴퓨터 게임을 하고, 나치에 대한 TV프로를 본다. 구스 반 산트는 그것들이 ‘원인’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두 아이를 기어코 샤워실에서 키스하게 만든 뒤 ‘한번도 누군가와 키스해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게 한다. 그 장면은 비평가들 사이의 논란을 야기시켰지만 이런 것이 바로 <엘리펀트>의 ‘순간’일 것이다. <엘리펀트>는 ‘원인’을 파헤치는 영화가 아니라 ‘순간’들에 대한 영화다. 학교라는 정글 속의 조용한 코끼리가 몸을 흔드는 것은, 아이들의 미세한 감정이 살짝 어긋나버리는 그 ‘순간’의 여진 때문일 테다. 구스 반 산트는 그 여진을 발생시키는 순간들을, ‘거실의 코끼리’를 ‘장님 코끼리 만지듯’ 조심스레 부위별로 카메라에 담는다. 코끼리를 거실로부터 몰아내는 여정은, 코끼리의 그림을 제대로 그려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엘리펀트>는 관람 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가슴을 쓰리게 만드는 영화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