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바람난 가족>의 호정
2004-08-27
글 : 정이현 (소설가)
시집잘가 호강하다 ‘고딩’이랑 사고쳐? 내참~ 복에 겨웠군

여보세요. 나야, 뭐하고 있어? 응, 애 유치원 보내고 아침 토크쇼 보고 있다고? 그렇구나. 나는 회사야. 나, 어제 시어머니랑 또 한바탕 했다. 우리부부가 맞벌이 하니까 아주 돈을 갈고리로 긁어모으는 줄 아시나봐. 글쎄 우리더러 시동생 결혼하는데 한 밑천 보태라는 거 있지? 이젠 정말 지겨워서 못 살겠어.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아침마다 동동거리면서도 한푼이라도 더 벌러 나오는 며느리 사정은 모르나봐. 아무튼 이럴 땐 시집 잘 가서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호강하는 여자들이 젤 부럽다니까. 그래, 나도 호정이 소식 들었어. 기가 막히더라. 걔 결혼할 때 우리가 다 입 벌리고 부러워했잖아. 신랑은 인물 좋은 변호사에, 시댁에 돈도 많고, 또 신세대 시어머니에다... 세상 부러울 거 없이 사는 거 같더니 그렇게 한순간에 끝장나는구나, 싶더라.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은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거야.

남의 애 임신한 마누라한테 왕창 위자료 줄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니? 그 남편이 아무리 잘난 척 해도 겉으로만 그런 거지. 한국남자들 중에 어디 뼛속까지 쿨한 남자 있든? 점점 배는 불러오는데 호정이 걔 요즘 고생이 말이 아니라더라. 그러니까 즐기려면 조용히 즐기지. 바보처럼 왜 덜컥 임신은 했나 몰라. 애 하나 낳아서 키우는데 돈이 또 얼마나 드니? 지가 무슨 세기의 발레리나도 아니잖아. 동네 무용단이나 왔다갔다하면서 어떻게 갓난아기랑 둘이 입에 풀칠하고 산다니? 여태껏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써온 씀씀이가 있으니까 더 힘들텐데 말야. 자존심 챙기는 건 좋은데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긴 했어.

근데 하고많은 남자 중에 왜 하필 ‘고딩’ 이랑 그랬을까. 물론 아직 때가 덜 탔으니까 애가 좀 순수하긴 했겠지. 하지만 과연 둘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했을까? 그 나이 남자애가 끌렸던 건 호정이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저 ‘만질 수 있는 여자 몸’ 이었는지도 모르잖아. 혹여 애를 가지고 싶었다 해도 그래. 그 남자애가 무슨 ‘씨내리’나 정자은행쯤 되니? 한 생명은 엄마 뿐 아니라 아빠도 같이 나눠야 할 책임이라고 봐, 나는. 또 거기서 남녀가 바뀌었다고 생각해 봐. 결혼생활이 권태로운 아저씨가 옆집 여고생과 교감을 나누고 성애에 눈뜨게 했다? 이건 완전 파렴치범이 따로 없잖아.

휴, 아무튼 호정이가 나랑 딱 이틀만 바꿔 살아봤다면 그런 결정은 안 했을 거야. 솔직히 ‘있는 애들’ 이나 쿨한 거 아니니? 남편이랑 속궁합? ‘포인트’ 가 사라져? 놀고 있네. 까놓고 말해서 걔 인생에 고민은 그게 다였잖아. 누구는 돈 벌랴, 살림하랴, 애 키우랴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말야. 누구는 뭐 바보천치라서 이러고 사는 줄 아나? 진짜 그냥 확 관둬버릴까 싶다가도, 또 꾸역꾸역 살아지는 게 인생인데 어떡하니. 그나저나 우리 시동생 결혼 어쩌면 좋니? 이번 달에 들어갈 돈이 얼마나 많은데. 어휴,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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