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감독 서세원의 ’변신’, 진짜 이유는?
2004-08-31
<도마 안중근>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만든 영화, 흥행목표는 2천만

8월29일은 국치일이다. 어제는 조선 순종이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한일합병을 공포한 경술국치(1910년) 94주년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이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인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옆 중명전에서 ‘국치일 복원 촉구대회’를 열어 8월29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라고 요구했다. 본래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있었으나 박정희 시절 명확한 이유 없이 삭제된 ‘국치일’을 맞아, 현재 폐가처럼 방치돼 정동극장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치욕의 현장인 중명전을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는 친일박물관이나 역사관으로 활용할 것을 촉구하는 이날 행사에는 뜻밖의 얼굴(?)들도 나타났다. 서세원씨가 보였다. 한때 잘 나가는 개그맨이었던 그가 여기에 온 이유는?

1986년 <납자루떼> 이후 18년 만에 그가 각본·감독을 맡은 영화 <도마 안중근> 시사회가 이날 2부 행사로 마련돼 있기 때문이었다. 2002년 연예계 비리 수사에 연루돼 공식석상에서 보기 힘든 그였다. 영화감독 서세원씨가 들고 나타난 작품은 <조폭마누라>의 아류작이 아니라 민족문제를 다룬 본격 다큐멘터리성 영화다.

“이문열의 ‘한일합방은 합법적’ 주장은 궤변”

서씨는 내내 밝은 표정이었다. 영화 <도마 안중근>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30주년 기념영화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자료는 함세웅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안중근기념사업회의 도움을 받았다. 국치일 중명전에서 만난 서세원씨를 무조건 붙들고 늘어졌다. 왜 남들을 웃기는 개그맨이 민족혼의 상징 ‘안중근’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을까. 서씨는 “전부터 안중근 의사를 존경했고, 그에 관한 영화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며 “안중근의 본 모습을 알려주고 싶었고, 그가 빈 라덴과 같은 부류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평화주의자였음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답변에도 의혹은 풀리지 않는다. <조폭마누라>로 큰 돈을 벌었을 그가, 상업영화를 포기하다니. 그의 과거에 대하 면죄부로 이 영화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30억이 들어간 이 영화의 대부분의 제작비도 스스로 조달했다고 하니.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니,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영화는 곧 삶을 다루는 거고,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코미디언이라고 해서 상업영화만 만들라는 법은 없죠.” 그는 이런 의혹어린 시선에 당혹해 했다.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자비를 털어서까지 <도마 안중근>을 만들었는데, “안중근 의사를 갱스터 영화에서 흔히 보던 총잡이로 그렸다, 영화 속 자막이 많다, 종교적 색채가 진하다”는 비난을 받을 때 힘이 빠진다.

▷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전의 안중근 실제사진 (출처 : 안중근 기념사업회)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돼 파렴치범으로 몰렸을 때 작품구상을 위해 중국에 갔어요. 한 달간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갔죠. 100년 전 32살의 젊은이가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대륙으로 건너가 활약한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찬 일이었어요. 검찰 수사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난 것은 (천주교 신자인 제게) 신의 계시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때 안중근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고요.”

순간 그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철저히 개인적 고민과 삶이 응집된 영화 <도마 안중근>이 자진의 한때 실수로 인해 저급하게 평가받는다는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저라고 민족의식이 없겠어요? 제 나이가 올해로 50살이에요. 충분히 인생을 살았고, 이제는 세상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나이가 됐으니까요. 부끄러운 일을 반성할 줄도 알고, 그런 점에서 친일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해요. 국민들이 알아야 할 권리니까요. 잘못에 연루된 분들은 스스로 죄를 밝히고 용서와 화해를 구해야죠. 그래야만 우리 국민들의 자긍심도 높아지고, 국민화합도 가능한 것 아니겠어요?”

<도마 안중근>은 ‘애국’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이 감옥에 수감된 뒤 수사 과정에서 검찰관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식이다.

안중근 의사는 소설가 이문열씨가 주장했던 대로 “한일합병이 합법”이라면 ‘테러리스트’가 된다. 이에 대해 서씨는 “이문열씨의 주장은 말이 안 돼요. 합법적이라는 말은 두 나라의 힘의 균형이 이뤄졌을 때, 맞장을 떠서 조약을 맺었다면 모를까 합법이 될 수 없죠.”라고 일축했다.

영화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유를 묻는 검찰관에게 “나는 이토 히로부미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의 침략을 만방에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을 뿐이다. 피해를 입힌 가족과 주변에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다. 송병준, 이완용이 등장할 때는 ‘을사오적, 한일합방을 주도한 매국노’ 등의 자막을 상세하게 달아주기까지 했다.

“흥행은 기대하지 않아요. 흥행을 생각했다면 이런 영화를 만들지도 않았겠죠. 다만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감동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최소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치른 날이나 돌아가신 날 정도는 기억하면 더 바랄 것이 없고요.” 이날 그가 정동극장에서 무료시사회를 개최한 이유이기도 하다. 30일에는 의정부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을 상대로 무료시사회가 예정돼 있다.

“제가 친일청산 얘기를 해서 그런지 보수언론에서는 제 영화를 제대로 홍보하지 않거나, 트집을 먼저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차피 이런 일들은 예상했던 것이구요. 만약 흥행에 참패하면, 전국을 돌며 무료시사회를 열 생각이에요.”

서씨는 계속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무료영화 보고 가세요! <도마 안중근>입니다!”라고 홍보했다. 연기파 배우 유오성과 윤주상이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로 열연하는 <도마 안중근>은 9월 10일 개봉된다.

서세원 감독과의 일문일답

흥행실패하면 전국돌며 무료시사 할터

<도마 안중근>을 제작하게 된 동기는?

연예계 비리사건에 연루된 뒤 미국에 있는 동안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 50살, 공자의 말대로 하면 ‘지천명’이다. 하늘의 뜻을 알아 그에 순응하거나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최선의 원리를 이해하는 시기 아닌가. ‘행동하는 안중근’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다. 6~7년 전부터 관련 책을 읽고, 공부했다. 일부 학자들은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로 분류해 빈 라덴과 같이 취급하는데 기분 나빴다. ‘손도장’으로만 알려지는 것도 속상했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은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었다. 궁극적으로 그가 평화주의자였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조폭마누라> 등 주로 코미디 혹은 상업영화를 줄 곧 해왔는데?

글쎄… 영화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코미디언이어서 코미디 영화만 만들라는 법 없지 않나. 일부에서는 면죄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안중근 의사의 삶이 가슴에 와 닿았고, 예전부터 한번쯤 해봐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애초부터 흥행은 생각하지 않았다. 흥행에 관계없이 시대가 요구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과거청산 얘기가 오가는 시점에 이런 영화를 개봉하게 됐는데, 의도한 것인가?

역사청산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난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 다만 밝힐 것은 밝히고,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학생들을 상대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최소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0월26일(1909년)과 돌아가신 날인 3월26일(1910년)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10월26일을 ‘박정희 서거일’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지 않나. 영화에 자막을 많이 넣은 이유도 역사적인 내용을 자세히 이해해 달라는 일종의 제스처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겠지만.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민족혼의 부활이다. 일제로부터 독립했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우리는 미국의 여러 영향력 아래 있고 친일청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미완의 독립상태다.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진정한 독립과 민족의 통일에 대한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흥행목표는?

2천만명이다. 북한 상영도 추진할 거다. 이런 영화는 흥행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이 보고, 느껴야 한다. 흥행에 실패하면 전국을 돌며 무료상영이라도 할 생각이다. 앞으로 이런 영화를 더 많이 만들고 싶다. (실제 그는 내년 3월부터 고구려의 중국투쟁사를 다룬 <아! 안시성>을 찍는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이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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