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예술과 사랑의 비밀을 누설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2004-08-31
글 : 김혜리
상상으로 복원된 17세기 초상화 속 소녀의 목소리. 예술과 사랑의 비밀을 누설하다

소녀는 왼쪽 어깨 너머로 당신을 바라본다. 옷은 국적을 알 수 없고, 머리에는 귀부인도 하녀도 아닌 여자들이 그랬듯이 천을 두르고 있다. 그녀는 누구일까? 소녀를 휘도는 모든 빛을 그러모아 매듭짓는 저 진주 귀걸이는 어디에서 났을까? 보이지 않는 귀에도 진주는 걸려 있을까? 지금 그녀는 웃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눈물을 삼키고 있는 것일까?

베일에 싸인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속 소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소녀는 어떤 가설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수많은 감정의 틈바구니에서 기적적인 균형을 유지하며 미소짓는 데에 성공한다. 이미지는 자기를 해명하지 않는다. 변명도 소명도 하지 않는다. <진주 귀고리 소녀>를 쓴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그 일을 문학의 몫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예술가의 영혼을 지닌 어린 하녀와 화가 사이의 드라마를 말없이 남겨진 초상화의 세부로부터 거꾸로 추리했다. 놀라운 시도는 아니다. 언제나 왼쪽 창에서 스며드는 백포도주 같은 햇빛과 문설주가 그리는 테두리 안에 들어앉아 명상 같은 노동에 몰입해 있는 베르메르의 여인들은 우리를 조바심치게 만든다(베르메르의 초상화에 기초한 연작 단막극이 기획된다 해도 그럴 법하다). 작가 파스칼 레네는 일찍이 고요한 그녀들에게서 동식물에 근접한 수동성을 보았다. 그의 <레이스 뜨는 여자>를 각색한 클로드 고레타 감독의 1977년 영화는, 대학생 애인에게 버림받은 시골 처녀 이자벨 위페르가 정신병동에서 정물처럼 유폐된 장면에서 정지했다. 그러나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베르메르의 모델에게 능동적 의지를 불어넣는다.

1664년 델프트의 소녀 그리트(스칼렛 요한슨)는 아버지가 사고로 눈이 멀자 하녀로 나선다. 그녀가 모실 주인은 최고의 화가 베르메르(콜린 퍼스). 사위의 그림을 거간하는 여장부 마리아 틴스(주디 파핏)와 히스테리컬한 안주인 카타리나(에시 데이비스), 여섯 아이와 자부심 강한 하녀 타네커가 소녀를 맞이한다. 식구들에게 성역과 같은 베르메르의 화실 청소를 맡은 그리트는 바다가 달에 끌리듯 예술의 아름다움에 눈뜬다(원작에서 베르메르는, 눈먼 아버지의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버릇과 색의 조화를 의식하며 야채를 써는 색감이 마음에 들어 그리트를 선택한다). 베르메르도 그리트 안의 작은 화가를 알아본다. 창을 닦으며 빛의 변화를 근심하는 그리트는 청소를 하며 정물의 구도에 개입하고 주인을 위해 몰래 물감을 만들기에 이른다. 안주인이 질투로 고통받을 무렵 화가의 부유한 후원자이자 호색한인 반 라이번이 그리트에게 흑심을 품고, 그녀와 여생을 함께하려는 푸줏간 집 아들 피터는 그리트에게 딴 세상을 꿈꾸지 말라고 충고한다.

<도브>의 베니스를 황홀하게 찍은 촬영감독 에두아르도 세라의 도움으로, 신인 피터 웨버 감독은 도제처럼 착실히 베르메르의 화풍을 스크린에 옮겼다. 연전의 <프리다>도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활인화로 재현하는 기교를 부렸으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영화 전편에 걸쳐 ‘원화’(原畵)에 복종한다. 자연광을 철저히 모방한 조명과 코스튬드라마로서는 매우 적은 대사는, 베르메르 그림의 색조와 친밀감, 침묵과 폐소공포증을 재현한다. 특히 움직일 때마다 벽과 살림살이가 거치적거리는 베르메르가의 아래층과 오직 화가와 소녀와 빛만 존재하는 탁 트인 위층 화실의 대비는 근사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예술사를 다시 쓴 <카미유 클로델> <톰 앤 비브> 같은 영화의 자매다. 그러나 이것은 천재의 광기가 낳은 비극적 로맨스나 숨겨진 예술가의 여자에게 걸작의 정당한 저작권을 찾아주는 반격이 아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그리트를 통해 한번도 재능의 뚜껑을 열지 못했던 잠재된 예술가들, 악보를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악성과 문호가 될 수 있었던 문맹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트에게 미학적 욕망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본능에 버금가는 절박한 욕구다.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가르치면서 배려하지 않는다. “시간은 네가 알아서 만들라”고 차갑게 말한다. 소녀는, 다른 하녀와 안주인이 알면 생계를 위협당할 것을 알면서도 빨래와 청소와 요리에 부르튼 손으로 다시 물감을 빻는다. 이것은 주인의 청이 아니라 그녀의 수련이다.

베르메르와 그리트의 교감은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로맨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영화는 멜로드라마를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베르메르의 연애담이 아니라 그리트의 추억담이다. 오히려 러브스토리로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흥미로운 화두는, 보는 행위와 사랑의 유비 관계다. 베르메르와 그리트는 같은 것을 본다. 그래서 연결된다. 모델이 된 그리트는 자기를 바라보는 베르메르를 본다. 이젤을 사이에 둔 베르메르와 그리트의 시선이 교차할 때 피어오르는 에로스는 강렬하다. 사랑은, 나를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예민한 베르메르 부인은 그리트의 초상 앞에서 울먹인다. “음란하군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뒤, 그리트의 손에는 진주 귀걸이 한쌍만이 남는다. 그것은 가난과 비천함과 타협으로 이뤄진 인생의 단단한 조개껍질 안에서도 기어이 응결된, 예술을 향한 어찌할 수 없는 열망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 원작 <진주 귀고리 소녀>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

명쾌한 문체와 절제의 정서로

“베르메르와 그리트의 섹스신은 없어야 해요.” 할리우드의 악명 높은 취향에 지레 겁먹고 있던 트레이시 슈발리에(1962∼) 는, <진주 귀고리 소녀>의 영화 판권 계약 테이블에서 대뜸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원작에 담긴 절제의 정서를 이해한다고 말한 영국의 제작사 아처 스트리트 필름과 1999년 계약을 맺었다. 후일담에 의하면 슈발리에는 그리트 역에는 스칼렛 요한슨보다 훨씬 작고 마르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녀를, 베르메르 역에는 앨런 릭맨을 상상했다고 한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자란 슈발리에는 학부를 마친 뒤 영국으로 이주했고, 1993년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영문학 창작 석사 과정을 마치고 처녀작 <버진 블루>를 1997년 출간했다. 슈발리에는 1998년 초, 19살 시절부터 방에 붙여놓았던 베르메르의 그림 안에 잠재된 무한한 이야기를 불현듯 발견했다. “베르메르가 내가 할 일을 다 해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전세계적으로 200만부가 팔렸다. 10대 여주인공, 어두운 사랑, 가족에 대한 책임과 예술의 아우라 등이 흥미진진하게 어우러진 이 소설에서 평자들은 베르메르의 그림처럼 정확하고 명쾌한 문체와 통찰력을 높이 샀다. 슈발리에는 이후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 직후를 살아간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추락하는 천사>, 중세 태피스트리를 둘러싼 예술가와 여인들의 다중시점 드라마 <여인과 일각수>를 내놓았다. 현재 슈발리에는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작품을 2007년 출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보듯 트레이시 슈발리에 소설은 영화로 변환하기 좋다. 풍부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고 캐릭터와 스토리라인은 선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의 역사소설은 프로이트 이전 시대를 산 극중 인물의 배경을 고려해, 심리분석을 늘어놓는 대신 주변 환경에 대한 인물의 반응과 행동을 건조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영화에 어울린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베르메르가 모범적인 가장이었다고 확신을 갖고 추정하는 애호가와 연구자들의 큰 반발을 사기도 했는데, <타임스>에 2003년 10월 사이먼 젠킨스가 기고한 글 <베르메르, 당신은 모함당했다>가 대표적이다.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2004년 3월 베르메르 작품 36점을 모두 직접 감상해 평생의 숙원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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