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가족’의 허상을 파헤치기에 공포물만큼 적격인 장르는 없다. 더구나 그 중심에 아이의 광기나 죽음을 위치시킬 경우 가족은 그 자체로 공포가 된다. <아카시아>나 부터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까지 가족과 아이와 공포가 뒤엉킬 때, 가족주의의 환상은 피투성이가 되어 너덜거린다. 유전자 복제라는 ‘사회적’ 문제에 치중하는 듯 보이는 이 영화에서도 공포의 중심은 단연 가족에 있다. 물론 유전자 복제라는 사회윤리의 문제를 공포의 주제로 연결한 시도는 참신하지만 (혹은 도덕 교과서처럼 지나치게 진부하지만) 실제 영화에서 공포는 생명 경시 풍조의 잔혹함이 아니라, 그 중심에 가족이 위치한다는 사실에서 유발된다. 죽은 아이를 억지로 살려내면서까지 완전한 가족을 재구성하려는 부부의 욕망, 망자를 애도하지 못하고 현실로 소환하려는 산 자의 이기적 얄팍함, 이 모든 행위를 아이에 대한 절절한 사랑으로 뒤덮는 모성의 끔찍함. 영화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복제 기술의 위법성과 부도덕성을 지적하지만 그 바탕에는 너덜거리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족주의의 무도덕성이 있다.
닉 햄은 전작 <더 홀>에서 이미 인간의 집착을 공포로 귀결시킨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끝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탄생시킨 이중인격의 아이는 공포의 존재로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 모든 과정을 감당하면서까지, 현실을 휘감는 공포의 그림자를 억지로 외면하면서까지 단란한 가족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오히려 더 두렵게 다가오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