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여성의 질, 그리고 욕망과 연대한 작가 카트린 브레이야
2004-09-01
글 : 심영섭 (평론가)

※스포일러 경고! <팻 걸>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결말을 이 비평은 담고 있습니다.

카트린 브레이야의 영화를 보면 나는 내가 여자라는 게 위로가 된다. 자부심이 된다. 거울에 비추어보기조차 쑥스런 나의 질과 자궁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부족하거나 잘려지거나 퇴화하거나 문드러지거나 헐렁해지거나 거세된 것이 아니며, 더더욱 이빨 같은 것도 달리지 않았다. 숨을 쉬고 호흡을 하며 목구멍이 따뜻한 짐승, 나의 질이여. 그리하여 나의 욕망은 고동치는 파도처럼 가슴 끝에서 머리끝까지 부드럽게 나를 감싸고 처음으로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전파처럼 맨살들을 꼬집고 간지럽힌다. 게다가 카트린 브레이야의 이미지는 힘이 세다. 그 이미지는 갈수록 파격적이고, 갈수록 도발적이고, 갈수록 충격적이다. 브레이야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늘 망치로 세게 두들겨맞는 느낌. 흰색과 붉은색의 색깔들은 으스러질 듯 충돌하고, 피와 끈적이는 액체들이 넘쳐난다. 예를 들면 브레이야의 최신작 <지옥의 체험>(제6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는 <지옥의 해부>로 상영)에서 게이 바에서 만난 남과 여는 여자가 남자에게 돈을 주고 자신을 지켜보는 계약을 체결한다. 마치 마네의 <올랭피아> 같은 서양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드 포즈로 알몸으로 누워 있던 여자는 그렇게 압침 같은 이미지로 못박혀 있는 것을 거부하고, 이윽고 일어나서 자신의 생리대를 물속에 넣어 그 피를 남자에게 마시게 한다. 그 피는 더러운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피가 깨끗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남자배우는 여자배우의 질에 커다란 립스틱 칠을 한다. 더 말이 필요없다. 여기엔 인문학적 주석도 필요없고 논리도 점잖음도 관여치 않는다. 두 다리 사이엔 숨김도 없고 수치도 없고 윤리의 저울추도 달려 있지 않다. 카트린 브레이야의 영화세상에서 우리의 질은 세상의 중심이며, 아름답고 당당한 두겹의 입술이다. 어떤 기관도 과잉인 것은 없다. 영화를 보며 이윽고 나는 카트린 브레이야의 이미지에 잡아먹혀도 좋다고 느낀다. 그와 동시에 아! 무엇보다도, 카트린 브레이야의 영화를 보면 비로소, 나는, 여성이 된다.

섹스를 통해 여성에 대한 억압과 문명의 억압에 맞서다

카트린 브레이야의 모든 영화는 섹스를 다룬다. 브레이야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영화는 섹스를 주제로 하지 소재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녀에게 섹스란 혹은 섹슈얼리티란 인간, 계급, 정체성, 폭력, 권력 등의 문제를 담는 커다란 그릇 같은 것이다. 그 가감없는 섹스 액트를 통해, 카트린 브레이야는 여성에게 가해진 사회적 억압과 인간에게 가해진 문명의 억압 모두에 맞선다. 인간의 허위 의식을 무 자르듯 잘라버린다. 한평생 가리라고 굳게 언약한 사랑과 로맨스를 이혼시킨다. <섹스 이즈 코미디> 속의 감독 잔느의 대사처럼 브레이야는 인간들이 섹스에 대해 위선적이라고 믿는다. 그런 인간들에게, 절대로 옷을 벗을 수 없다는 남자배우에게, 잔느는 말한다. “음탕해 보일까 걱정하지 마. 음탕함을 걱정하는 게 음탕함을 만들지. 카메라는 보이는 것만 담지 않아. 생각과 감정도 담아내지. 감정은 절대 음탕하지 않아. 감정은 우아해.”

종종 브레이야의 영화에서 사랑이라 믿었던 섹스를 한 여인들은 재앙을 맞이한다. 소녀들의 순진무구함은 더욱더 그렇다. <팻 걸>에서 “널 소중히 여길 거야. 우리 엄마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오늘밤엔 안 해. 처녀를 떼면 남자는 다시 오게 돼 있어” 같은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긴 남자에게 넘어간 소녀는 다음날 남자가 정표로 준 반지가 훔친 것임을 알게 된다. 영화 <로망스>에서 여자가 남자를 사랑할 땐 남자는 여자를 거들떠도 보지 않더니, 반대로 여자의 마음이 떠나자 남자는 비로소 여자에게 안달복달한다. 물론 <인 더 컷>의 제인 캠피온처럼 아버지의 스케이트날이 어머니의 다리를 싹둑 자르는 강렬한 구혼식이나 <피아노>처럼 문화인류학적 방법으로 로맨스의 허위 의식을 폭로하는 여성감독도 있지만, 브레이야의 경우는 늘 성기 노출 같은 극단의 섹스를 경유하는 과격한 수를 쓴다. 브레이야에게 있어 섹스의 인공성을 폭로하면 코미디가 되고, 섹스의 환상성을 폭로하면 비극이 되며, 섹스의 폭압성을 폭로하면 호러가 된다. 그녀에게 있어 섹스는 코미디이자 비극이자 처절함이며, 동시에 섹스는 섹스이다.

브레이야의 영화 - 여성의 느낌, ‘질’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다

브레이야의 영화를 보고 여성이 된다는 뜻은, 그녀의 영화가 거의 유일무이하게 여성 스스로가 느끼는 섹스의 느낌이 어떠한지를 정확히 전달해준다는 뜻일 게다. 그것은 <파리의 연인>이 심어주는 안온한 로맨스의 세계도 아니고 부모의 훈계로 시작된 교훈, 평생 단 한 남자의 그것만 쳐다보고 살라는 금기에서 비롯되는 두려움과도 연관되지 않는다. 그것은 질로 받아들이는 세계이며, 질로 내놓는 브레이야 본인의 느낌이다. 그것이 똑같이 여주인공이 팬티 끈을 부여잡고 놓지 않았던 홍상수의 <오! 수정>이나 루이스 브뉘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과도 다른 점일 것이다. 홍상수의 여주인공이나 브뉘엘의 여주인공들의 밀고당기는 승강이를 보고 있노라면, 이들 남성감독들이 다분히 여주인공의 행동을 ‘처녀막 값에 대한 고민’으로 해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에 대한 담보나 거래조건으로서의 처녀막. 그러나 카트린 브레이야는 <팻 걸>에서 이들 숫처녀들의 승강이를 자본주의와 연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남자를 등지고 웅크리고 있는 포즈를 통해, 처음 경험하는 자신의 신체에 가해지는 변화에 대한 전면적인 두려움, 전세계가 관통하는 듯한 그 느낌이 가질 중대함, 욕망을 따라갈지 자존심을 지킬지 사이의 치열한 싸움으로서 그 설렘과 망설임을 갈피갈피에 꽂아둔다. 우리가 한때 느꼈던, 그녀들이 느낄 바로 그 느낌 말이다. 관찰되어지기보다 여성 내부에서 나오는 바로 그 느낌 말이다. <진실한 소녀>부터 <지옥의 체험>까지 사실 카트린 브레이야의 모든 영화는 이 주제에 대한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브레이야의 여주인공들은 때론 뚱뚱하고 때론 자살을 시도하고 때론 지나치게 순진하고 때론 병적으로 남자에 매달리고 때론 터무니없는 연상의 남자를 사귀지만, 성에 대한 자신의 기대나 느낌이 무엇인지 속이지 않는다.

그 점이 언뜻 굉장한 비극이나 공포영화나 사도마조히즘처럼 보이는 브레이야의 영화를 완전히 달리 해석할 수 있게 만들고, 어떤 입체성을 부여하는 지점일 것이다. <팻 걸>에서 소녀 아나이스는 어머니와 언니를 죽인 강도에게 강간을 당하지만, 경찰에게 강간을 당하지 않았노라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브레이야가 소녀의 입을 통해 그 말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데 있다. 우리는 소녀가 진정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분명히 알 길은 없다. <센스 오브 시네마>의 브라이언 프라이스 같은 평론가는 아나이스가 이를 강간이 아닌 일종의 성적 경험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는 개인적인 소감을 피력한다. 그러나 당대의 여류평론가 루비 리치와의 인터뷰에서 브레이야는 가장 확실한 것은 소녀는 자신의 육신이 아니라 마음은 강간당하지 않았노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브레이야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다분히 시트콤적인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그리하여 그 사회의 통념에 흡수당하고 자신의 처녀성을 잃은 아나이스의 언니인 엘레나의 첫 경험이 강간에 가깝다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녀가 처녀인지 아닌지를 궁금해하는 사회, 그 질문이 강간이라는 것이다. 사실 겁에 질린 무표정한 눈을 담은 <팻 걸>의 마지막 프리즈 프레임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400번의 구타>와 달리, 여기에 부드러운 피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브레이야는 공개석상에서 아이와 여성을 일평생 미화시킨 이 남자, 프랑수아 트뤼포를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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