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이 너무해>의 한 장면. 금발이 주는 골 빈 이미지 때문에 애인에게 버림받은 엘(리즈 위더스푼)에게 누군가 묻는다. “그래서 그의 약혼녀는 너보다 예뻐?” 몇초간 고민하던 엘이 대답하길, “음… 화장을 하고 좀 꾸미면 그리 나쁜 얼굴은 아니지”. 이는 이 영화에서 금발 미인의 대립항, 잘난 척하는 우등생 비비안을 연기했던 셀마 블레어의 외모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검은 머리, 단호한 턱, 깊이를 알 수 없는 약간은 처진 눈,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드라큘라>와 같은 고딕호러영화 속에서 막 뛰어나온 듯한 블레어는 사실 ‘좀 꾸미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아가씨. 그는 ‘그리 나쁘지 않은 얼굴’로 아름답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배우들이 차고 넘치는 할리우드에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과감함으로 자신의 ‘다름’을 보여줬다.
백치미를 폴폴 풍기면서 못된 장난에 이용당하는 숫처녀(<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친구들과 함께 레스토랑 안에서 교성을 지르며 ‘그것’을 밝히는 왈가닥 노처녀(<피너츠 송>), 약혼자를 빼앗긴 뒤 질투에 휩싸이는 보수적인 예비신부(<총각은 어려워>). 그간 셀마 블레어는 ‘배우가 망가질 수 있는 열 가지 방법’을 선보이려고 작정이나 한 듯 변화무쌍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야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을 선보인다. 안티히어로 <헬보이>의 짝사랑 리즈 셔먼으로 돌아온 것이다. 슈퍼히어로영화의 여주인공들과는 달리 음울하고 소심한 면모를 가진 리즈는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힘으로부터 도망치려하지만, 결국은 인생과 사랑 모두에서 비범한 길을 걷기로 결심하는 또 한명의 안티히어로. 블레어는 한때 ‘코믹 이미지를 가진 그가 리즈를 연기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세간의 우려를 감수해야 했지만, <헬보이>의 개봉 이후, 그가 아닌 리즈는 이제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최근 전설적인 로커 프랭크 자파의 아들인 아멧 자파와 약혼하면서 인생의 동반자를 얻은 셀마 블레어. 이 비범한 배우의 필모그래피의 대부분이, 과감한 노출을 감행했던 토드 솔론즈 감독의 <스토리텔링>을 비롯한 수많은 인디영화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영화의 규모나 제작비도 그가 영화를 선택하는 고려사항은 아니었던 것이다. 평범한 사회에 편입되기 위한 노력을 그만둔 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행복해진 리즈와 달리 블레어는, 일찌감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임을 알고 있었다. 리즈의 딜레마에 대한 블레어의 해답은 이렇다. “결국 자신이 가진 것으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