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고딕호러에서 본 듯한 여인, <헬보이>의 셀마 블레어 Selma Blair
2004-09-02
글 : 오정연

<금발이 너무해>의 한 장면. 금발이 주는 골 빈 이미지 때문에 애인에게 버림받은 엘(리즈 위더스푼)에게 누군가 묻는다. “그래서 그의 약혼녀는 너보다 예뻐?” 몇초간 고민하던 엘이 대답하길, “음… 화장을 하고 좀 꾸미면 그리 나쁜 얼굴은 아니지”. 이는 이 영화에서 금발 미인의 대립항, 잘난 척하는 우등생 비비안을 연기했던 셀마 블레어의 외모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검은 머리, 단호한 턱, 깊이를 알 수 없는 약간은 처진 눈,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드라큘라>와 같은 고딕호러영화 속에서 막 뛰어나온 듯한 블레어는 사실 ‘좀 꾸미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아가씨. 그는 ‘그리 나쁘지 않은 얼굴’로 아름답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배우들이 차고 넘치는 할리우드에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과감함으로 자신의 ‘다름’을 보여줬다.

백치미를 폴폴 풍기면서 못된 장난에 이용당하는 숫처녀(<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친구들과 함께 레스토랑 안에서 교성을 지르며 ‘그것’을 밝히는 왈가닥 노처녀(<피너츠 송>), 약혼자를 빼앗긴 뒤 질투에 휩싸이는 보수적인 예비신부(<총각은 어려워>). 그간 셀마 블레어는 ‘배우가 망가질 수 있는 열 가지 방법’을 선보이려고 작정이나 한 듯 변화무쌍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야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을 선보인다. 안티히어로 <헬보이>의 짝사랑 리즈 셔먼으로 돌아온 것이다. 슈퍼히어로영화의 여주인공들과는 달리 음울하고 소심한 면모를 가진 리즈는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힘으로부터 도망치려하지만, 결국은 인생과 사랑 모두에서 비범한 길을 걷기로 결심하는 또 한명의 안티히어로. 블레어는 한때 ‘코믹 이미지를 가진 그가 리즈를 연기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세간의 우려를 감수해야 했지만, <헬보이>의 개봉 이후, 그가 아닌 리즈는 이제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자신’(自信)을 가진 사람은 자신(自身)을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개의치 않는 법. <헬보이>의 개봉을 앞둔 블레어는, 끝을 모르는 코믹연기가 부담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만 아니라면 남을 웃기기 위해 혹은 관객에게 영화의 어떤 부분을 믿게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나는 언제든 스스로를 희화화할 준비가 돼 있다.” 그렇다고 그가 매번 그렇게 온몸을 던지는 코믹 연기에만 도전했던 것은 아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서는 사라 미셸 겔러와 나눈 리얼한 키스신으로 ‘MTV가 선정한 최고의 키스상’을 수상했는데, 이 역시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를 보여주는 작은 단면에 불과하다. <헬보이>의 마지막, 헬보이와 함께 불길에 휩싸이는 인상적인 키스신을 선보인 블레어에게 기자들은, “이번에도 같은 상을 수상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었다. “나는 그것이 매우 강렬한 키스였다고 생각하고, 사실 이번에도 분명히 ‘설왕설래’가 있긴 하다. 하지만 MTV에게 악마의 키스는 (두 여자가 나눈 키스에 비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을 것 같다. 후보지명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거침없는 유쾌함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블레어의 답변이다.

최근 전설적인 로커 프랭크 자파의 아들인 아멧 자파와 약혼하면서 인생의 동반자를 얻은 셀마 블레어. 이 비범한 배우의 필모그래피의 대부분이, 과감한 노출을 감행했던 토드 솔론즈 감독의 <스토리텔링>을 비롯한 수많은 인디영화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영화의 규모나 제작비도 그가 영화를 선택하는 고려사항은 아니었던 것이다. 평범한 사회에 편입되기 위한 노력을 그만둔 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행복해진 리즈와 달리 블레어는, 일찌감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임을 알고 있었다. 리즈의 딜레마에 대한 블레어의 해답은 이렇다. “결국 자신이 가진 것으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진제공 GAMMA

관련 영화

관련 인물